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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나른한 일요일 오후, 음악을 틀어 놓고 술술 편하게 읽으려고 표지가 멋진 소설 한 권을 집어 들었을 뿐인데, 하필이면 생각에 생각을 끄집어내는 집요한 단편집이었다. 소설에 대한 간편한 접근은 편견이었던 걸까 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껐다. 대중 매체를 통해 노출된 김연수는 익숙했으나, 번역한 그림책 말고는 딱히 그의 글을 읽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처음 접한 그의 이야기들에서 의도와는 다른 심오한 글맛을 발견했고 두세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오후의 독서 계획이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일곱 살 케이케이가 '시체수영'(송장헤엄이 아니라)을 터득 했다는 그 곳을 그리워하는 이국의 여인... 그녀는 오래 전 죽은 연인 케이케이를 찾아 통역으로 붙은 혜미와 짜증스런 대화를 벗어나 어떤 동질감으로 향해 간다. 세살의 늦둥이를 잃은 혜미와 진정 사랑했던 연하의 남자 친구를 잃은 그녀의 자유롭지 못한 그리움의 이야기...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섬으로 여름 휴가를 온 고3의 그녀에게 집착하는 아직은 순수한 혈기의 현과 그 고장 출신의 친절한 호텔 벨보이, 뜨거운 데킬라 한 잔과 더불어 그녀를 일탈로 몰고 가는 이미 한물 간 가수와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바다, 무서운 바다의 이야기...
도서관 빈 게시판에 걸린 작고한 시인의 미발표작 詩 하나로 시작되는 '메타세쿼이아, 살아있는 화석'의 사연에 빨려 드는 스물다섯 청년,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 모임에서 궁금증을 풀어 가는 황혼의 여인 희선씨와의 만남... 이뤄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시인의 마지막 고백과 묻어 둔 사연이라는 문맥을 찾아 그 나무로 다가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
그녀의 서른 번 째 생일날, 일본에서 신혼여행 온 한국말에 서툰 6촌 동생 부부와 함께 남산에서 내려와 잡아 탄 것은 하필 헤어진 남자 친구 종현의 택시였다. 바흐 칸타타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를 들으며, 스물일곱 살부터 계획했던 북미 여행의 꿈이 깨진 씁쓸한 생일 밤, 촛불문화의 밤과 용산 참사의 기억에서 멀지 않은 바로 그날 하루 1440개의 일 분들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세상,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어느 섣달 그믐날, 아내의 친구라는 한국말이 서툰 인도인 노동자가 방문했다. 지난 가을부터 한국말밖에 모르는 아내와 말이 통했다는 도대체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찝찝한 인연과 캔 맥주를 마시며 단 둘이 대화한다. 어떤 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연 깊은 피아노를 마주하고 낯선 시크 교도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엉뚱한 상황에서 뭔가 어색하지만 속깊은 진지한 교감들... 그 친구 사트비르 싱이 연주하는 피아노 곡과 다가올 아내의 귀가 시간, 다가오는 새해...
어느 바닷가 도서관에서 자신의 신념을 찾아 집착하는 장년의 한 남자를 이야기 한다. 군사정권 후반에 시작되어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는 동안까지도 멈추지 않는 그의 도서관 출입은 직원들의 관심 속에서 그는 대공담당 형사였음이 밝혀진다. 자신의 물고문으로 죽어간 젊은 대학생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찾아 시작했지만 책을 읽을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픔과 도서관 사서 강의 눈물...
엄마가 죽던 날 발견한 독특하고 아름답던 평생 잊지 못할 노을 풍경, 바로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남겨준 감동의 사진, 그 사진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판사의 부탁으로 평전을 맡아 쓰게 되면서 시작된 남편의 질투와 교감이 통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반발심... 작가가 흑두루미와 노을을 남겼던 일본 가고시마의 현장을 다시 찾아가는 그녀. 유학생이던 부모를 따라 세 살에 일본에 건너간 (수년 전에 코디네이터였던) New Comer 김경석씨와 다시 만나 주고받는 미아들(?)의 이야기...
천칭자리의 영국 청년 알렉스가 재클린을 꼬셔서 여행을 시작했고, 유럽풍의 해변 도시(청도?)에서 레드스타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리 선생의 도움을 받는데, 죄의 냄새가 풍기는 노인 리 선생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데 몽롱하다. 알렉스의 뒤를 이어 리 선생의 이야기를 써야하는 순간에 그것은 알렉스가 받아 적었던 그 이야기의 형식은 변해 간다. 빼앗긴 재클린과 익명성과 혁명 시절의 이야기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의 눈물과 알렉스의 알 수 없는 슬픔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되풀이 하여 다시 쓰며 속죄하며 거듭나는 이야기들...
라스베가스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작가의 영감이 만들어 낸 비운의 복서와 한 코미디언의 뭉클한 이야기... 유랑 극단에서 '달나라로 간 별주부전'의 레퍼토리를 가진 아버지의 안복남이 신군부에 아부하는 장면의 기록을 발견하는데... 연기 중에 무대에서 떨어진 사건과 앞뒤 사정도 모르게 홀연히 미국으로 달아난 이야기... 그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안PD의 원망은 점자도서관의 이관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해가 풀려 가는데, 의문의 실종 사건... 그리고, 달!
너무나 많은 죽음들이 쏟아지는 우울한 소설집...
그저 마음의 안식처와 일요일 오후의 따뜻한 마음 데우기를 위해 선택한 책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짧게짧게 잘 정리된 김연수의 글이 좋아졌다.
한 번 쓰고, 또 얼마나 많이 다듬었을까를 생각 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가을 들판의 멋진 여인과 분홍빛 엠보싱이 아름답던 표지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