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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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문집 완독 프로젝트 다섯 권째는 '황금물고기'로 오래 전 단행본으로 나왔던 것을 시리즈로 묶은 것이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인상적인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강원도 양양 남대천의 연어를 생각했다.



검은 대륙의 소녀가 있었다.
인신매매로 처음 팔려 온 곳은 랄라 아스마라는 노파의 집이었고, 때는 밤이라 밤을 의미하는 '라일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딘지도 모르는 고향과 기억나지도 않는 본명과 가족들... 소녀의 정체성은 그저 라일라일 뿐이다.
랄라 아스마가 죽자, 아벨이란 포악한 아들과 조라라는 못된 며느리 밑에서 구박받으며 생활하게 된 라일라, 어느 날 그 집에 손님으로 온 들라예 부부 덕분에 구원을 받지만 마냥 좋을줄로만 알았던 들라예씨 조차도 아벨만큼 추악한 손을 뻗치고 라일라는 뛰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예전에 알게된 자밀라 아줌마와 창녀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생활하게 되지만 그것도 오래 갈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지브롤터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진출하게 된다. 더 나은 생활을 찾아 파리에 온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불법체류로서의 유럽생활은 비참하지만 소녀 라일라에게는 당연히 버텨야 하는 삶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플 소녀는 임신한 창녀 후리야까지 책임지는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파리에서 병원잡역부로 일하면서 알게 된 늙은 여의사 프로메제아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안일을 하며 지내게 된다. 그런 그녀는 슬슬 매력적인 여인의 향기를 품어내게 되고, 아프리카 출신의 가난한 복서인 노노는 라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어느날 라일라는 프로메제와와의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고, 그 집을 뛰쳐 나와 자블로 거리에 있는 노노의 지하실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노노의 단짝인 의식이 투철한 하킴을 만나 프란츠 파농의 사상에 빠져 들게 되고, 하킴의 할아버지인 엘 하즈 노인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엘 하즈 노인은 라일라를 통해 죽은 손녀 마리마를 기억했고, 마치 손녀를 대하는 냥 라일라에게 부탁한다.

"사람들이 모든 걸 망쳐버렸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길이 나고, 다리와 공항이 지어지고, 카누들은 하나같이 뒤를 잘라내고 발동기를 달았지. 나 같은 늙은이가 거길 뭐 하러 가겠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네가 나를 내 집에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구나. 팔레메 강가의 얌바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묻힐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거기니까 거기로 돌아가야지."
(176쪽)

위의 글을 읽으며 나는 회귀 본능이라는 단어와 남대천의 연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세상을 떠난 노인은 결국 세네갈의 강줄기와 팔레메 강 변의 얌바 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고속도로 옆 공동묘지에 묻힐 날만 기대리는 상태에서 라일라는 떠난다. 계속되는 라일라의 역경과 고난의 세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아야만 했던 소녀는 파리의 한 역사무실에 무임승차와 불법체류로 억류되면서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아주 작고 하찮은 물고기인 것 같다고... 이 때부터 소녀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내게는 맑지 못한 탁한 물을 헤엄쳐 가는 한 마리 연약한 물고기의 물길질이 되어 읽혀지기 시작했다.

기자인 베아트리스의 도움으로 역무실에서 풀려나와 몸과 마음을 추스린 라일라는 자신이 어디로 부터 흘러왔는지 그 근원도 알지 못하고, 어디로 헤엄쳐 가야하는지 그 목적도 모르는 물고기의 삶은 우울하다. 일개 독자인 나의 시선은 측은지심에 우울하게만 읽혀지지만 정작 소녀는 당차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꾸준히 헤엄쳐 나간다.

그러던 중 엘 하즈 노인이 남겨준 유산으로 노인의 손녀이자 하킴의 여동생인 마리마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신분증(여권)을 받는다. 생전에 엘 하즈 노인이 자신과 마리마를 혼란스러워 했는 줄 알았는데, 불법체류자인 라일라를 합법적인 신분의 마리마로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되며, 노인에 감사하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더욱 더 강해진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던 노노와 사랑을 나누고 니스로 떠나는 라일라... 이제 그녀는 소녀에서 숙녀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로 헤엄쳐 나가는지 알 수 없지만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그릇도 커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깊은 감동이다.

그를 따르는 소년 주아니코와 함께 니스로 이동하여 그곳 구제소에서 지내는 동안 라일라는 비참함을 잊고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닥치는 대로 읽은만큼 라일라의 세상은 점점 크고 넓어져 간다.


이 책의 212쪽에 수록된 시의 구절, '작은 새들에게는 끔찍한 밤이다.', '소리도 없고 음성도 없다.' 등은 시상을 떠나 구제소에서 비참한 삶의 거울이자, 여태 살아 온 그녀 인생의 거울과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하킴을 통해 접한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로 부터 서서히 의식적으로 자기 세계를 찾아가는 라일라의 강인한 물길질이 시작되는 순간으로 읽혀지는 구절이었다.

니스에 지내는 동안, 콩고르드 호텔의 바에서 새라라는 여자를 만났다. 어려서 한 쪽 청각을 잃은 라일라가 한 쪽 귀만으로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이끌려 걸어가다가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만났다.서로의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음악으로 교류하였으며 라일라는 뭔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게 된다.

신분도 확실하고 내공도 탄탄해진 라일라는 프랑스에서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도전하기도 하지만, 프란츠 파농과 레닌을 인용한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장문의 답안지를 제출하는 등 이미 스스로 의식의 그릇이 커진 상태에서 합격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자신의 목적지를 보스턴으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라일라는 베아트리스와 레이몽의 경제적인 원조를 받아 보스턴으로 떠날 때까지 애타게 찾았던 첫사랑 노노와 후리야 등은 끝내 만나지 못한다.

저프와 새라 커플이 함께 생활했던 보스턴에서의 처음 생활도 저프의 성추행 미수 사건으로 좋지 못하게 끝난 라일라는 시카고에서 온 장 빌랑을 사귀게 된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만큼 성장한 라일라는 에스테반(엘 세뇨르)이 운영하는 호텔의 바에서 피아니스트로 일을 하게 되며, 나중에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가수로도 일을 하게 된다. 장 빌랑에게는 안젤리나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라일라는 겁없이 삼각관계를 유지한다.
빈민가 로빈슨 거리에서 지내면서 이웃에 사는 거인 알시도르를 지켜보고 지내던 어느 날, 경찰단속에 억울하게 말려드는 알시도르의 아픔을 떨어져서 지켜보는 마음이 복잡한 상황에서 르로이를 만나 그녀는 '지붕 위에서'라는 공식 음반을 내게 된다. 기회의 나라 미국의 덕을 톡톡히 보며 큰 돈도 만질 수 있게 된다. 그녀는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수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고 막막하고 낮고 깊은 울림, 파도가 육지에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 한없이 이어지는 철로 위에서 열차가 달리는 소리,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뇌우의 간단 없는 우르릉 소리였다. 또한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한숨소리, 혹은 그 낯선 이가 웅얼거리는 소리, 밤중에 깨어나 혼자임을 절감할 때 내 동맥 속으로 피가 흐르는 소리이기도 했다.
(246쪽)

방황하는 물고기에게 그 안정된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라일라는 장 빌랑과의 마지막 사랑을 나누지만 삼각관계를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한 채 장을 떠나 임신한 몸으로 벨라와 함께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나게 된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도중에 열병에 걸려 앓다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자마자 유산을 하게 된다. 열병으로 유산한 그 고통의 순간에 벨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샌버너디노의 한 병원에서 뚱뚱한 인디언 간호사 샤베즈(나다)와의 우정이 싹튼다. 청각을 모두 잃은 라일라는 몽환적인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르로이로부터 니스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 초대장을 받고 니스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니스에 머물지 않고 호텔측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세르베르- 마드리드-알제시라스를 걸쳐 페리를 타고 검은 대륙으로 떠난다.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지나 품-즈귀드에 도착한 것으로 그녀는 그곳이 자신의 목적지임을 확신한다. 15년 전 자신이 유괴되었던 바로 그곳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다음 날 도착할 장을 기다리며 오랜 여행을 끝낸다.
남대천에 도착한 10월의 연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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