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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꽃미남의 전성 시대에 의미심장한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 되었다.
못생기고 나이 먹은 남자들은 '잘생기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여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예쁘면 모든 걸 용서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아, 불혹을 앞 둔 나도 꽃미남 밝히는 아내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생긴 걸로는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지난 세월들... 나도 미남이었더라면 인생이 지금보다 확 폈을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문체부 장관 유인촌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복 받은 얼굴의 소유자인지 동의하지 않을 자 어디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 꽃미남이 건재하 듯, 19세기 프랑스에는 수많은 벨아미들이 승승장구 하고 있었음을 '기 드 모파상'이 잘 그려내고 있다.
"어머! 벨아미!"
드 마렐 부인이 웃었다.
"어머나, 벨아미라고! 로린이 멋진 별명을 지어 드렸구나! 당신께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예요. 저도 앞으론 벨아미라고 부르겠어요." (123쪽)
문구회사 '모나미'를 먼저 떠올리게 했던 '벨아미(Bel-Ami)'는 '미남 친구'라는 의미의 불어이다. 뒤루아와 드 마렐 부인이 서로에게 밀착되어 가는 순간 도착한 로린의 한 마디로 그렇게 그의 별명은 벨아미가 되어버렸다.
뒤루아는 옛날보다 훨씬 돈이 많이 필요한 만큼 가난의 고통을 한층 뼈저리게 느끼고 항상 이런 구차한 생활을 짜증스러워 했다. 그래서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가 마음 속에서 차츰 높아지고 온종일 끊임없는 격분이 하찮은 이유를 계기로 말끝마다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137쪽)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잘 생긴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별 볼일 없는 비정규직 직장을 잡고 서울 변두리 허름한 옥탑방에서 사글세를 살다가, 잘 나가는 군대 동기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자. 이 소설은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친구 덕에 좋은 직장을 얻고 뒤를 봐주는 돈 많고 너그러운 부인과 사귀게 되었는데, 요새 말로 부인의 팻(?)이 되는 것이다. 변두리 옥탑방에서 부인의 도움으로 시내 중심가 원룸으로 옮겼다고 상상해보자. 수입도 늘고 제법 봐줄만한 귀부인과 질펀한 사랑을 나누며 신분이 상승한 느낌인데, 워낙 바탕이 없다보니 오히려 사회적 불만은 커져버린 것이다. 뒤루아가 바로 그랬다.
"뒤루아 씨, 저는 사랑에 빠진 남자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한답니다. 그런 사람은 바보가 되죠. 아니 바보일 뿐 아니라 위험한 사람이죠. 그래서 저는 저를 사랑하는 남자나,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친근한 관계를 일체 끊고 말아요. 왜냐하면 우선은 귀찮고 또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를 미친개를 상대하는 것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남자를 멀리하면서 그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이걸 잊지 않도록 하세요. 전 잘 알아요. 남자들에게 연애는 식욕 같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제게는 반대로 일종의 뭐랄까······ 영혼의 일치같은 거예요. 남자들의 생각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죠. 당신네들은 글자를 배열하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전 그 정신을 알려고 해요. 그런데······ 제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159쪽)
가련한 뒤루아, 제법 배가 따뜻하고 살만해지자 이제는 자신을 제법 살만하게 이끌어 준 친구 샤를의 아내까지 탐을 하기에 이르고 멋진 연기로 그녀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돌아오는 대답은 매우 이성적이고 능수능란한 범접할 수 없는 음기였다. 그렇게 둘은 그냥 거리를 두고 좋은 친구로 남는데...
"저어 뒤루아 씨, 전······ 벌써······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잘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대답을 들려드리지 않고 당신을 떠나 버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좋다고 싫다고도 하지 않겠어요.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고 서로 더욱 잘 알도록 해요. 당신도 충분히 생각해 주세요. 너무 경솔하게 일시적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가엾은 샤를이 아직 무덤 속에 묻히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런 말씀을 당신한테서 들은 이상 제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계셔야 하기 때문이에요. (중략) 제 생각이 세상 보통 여자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바꿀 맘은 없어요.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것뿐이에요." (256쪽)
꽃미남 뒤루아에게는 모든 것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진다. 친구이자 직장인 신문사의 상사였던 '샤를 포레스티에'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빈자리가 또 하나의 기회가 되고 덮썩 물고 들어가는데, 나름대로 우아하고 능수능란한 여우의 기질을 타고난 듯 했던 그녀가 슬슬 넘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친구의 시신에서 수염이 자라는 것을 목격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주고받을 대화로 매우 부적절한 내용이지만 두 미남미녀의 가까운 미래는 충분히 그려진다.
이제는 이름도 보다 귀족적으로 조르주 뒤루아 드 캉텔로 개명 하고, 친구의 미망인 마들렌과 부부가 되어 더욱 더 승승장구 하게 되는데...
"좋아. 그럼 나도 이제부터 남들처럼 벨아미라고 부르겠네. 그런데 여보게, 굉장한 사건이 생겼네. 내각이 310표 대 102표로 쓰러졌네. 우리의 휴가는 연기일세. 무기한으로 연기야. 7월28일인데 말일세. 스페인이 모로코 문제로 몹시 분개해서 결국은 뒤랑 드 렌과 그 일당이 내팽개쳐진 셈이지. 뭐, 뒤죽박죽대혼란이야. 마로가 후계 내각을 조직할 것을 위촉 받았네. (중략) 각 장관들에게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간단명료한 원칙 선언을 말일세." (365쪽)
이제 변두리 촌놈이 아니라 중심부 인물이 되어 귀족들의 삶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는 우리의 벨아미... 예술을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유망한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헐값에 사들여 그들이 유명해지기를 기다리는 투기꾼 왈테르 영감도 이젠 가면만 썼다 뿐이지. 다같이 속물 집단의 속물 친구가 되어 준다. 아, 참으로 눈부신 성장이다.
문득 그는 드 마렐 부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서로 주고받았던 키스며, 갖가지 애무와 그녀의 귀여운 행동이 떠올라 다시 한 번 그녀를 정부로 삼고 싶다는 돌연한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어린애처럼 눈을 굴이고 있었다. 조르주는 '역시 정부로선 나무랄 데 없는 여자야.'하고 생각했다. (502쪽)
이제 모든 여인들의 뒤통수를 치고, 왈테르 영감의 뒤통수까지 치고도 그의 딸 쉬잔과 아름다운 축복의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에도 우리의 벨아미가 뇌까리는 속마음이다. 그리고 소설은 끝나가지만 분명히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길 것이라 확신하며 책을 덮는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씁쓸한...
이 시대의 꽃미남들에게 더욱 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모파상 특유의 냉소적 명작!
뭐 어떡하겠나? 못생긴 내 얼굴 조상 탓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다만 부러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