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의 어린 창부
김춘수 지음 / 월간에세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김춘수 시인의 시와 에세이 묶음집 한 권이 다소 이국적이고 외설적인 제목으로 재출간 되었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시집은 특히 외모가 예뻤으면 좋겠는데, 15년만의 개정판임에도 표지는 균형도 어색하고, 멋스럽지 못한 캘리그라피로 장식되어 많이 아쉽다.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김춘수 시인의 시는 단연 '꽃'이 이 책 17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존재의 이유와 함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누구나 꽃을 생각하면 봄이 떠오르고, 봄을 상징하는 것 또한 꽃이기에 '봄은'(32쪽)이란 시가 눈에 띈다. 중앙대 겸임 교수 임종두 화백의 화사한 그림과 함께하는 본문은 표지의 못난 억울함(?)을 과감하게 벗겨준다고 볼 수 있다.

표제시 '마드리드의 어린 창부'는 이국적인 글이 많이 수록된 이 책의 특징을 압축한 책일 수도 있으나 독자로서 그다지 감흥도 없고, 시인이 그렇게 다양한 소재로 활용한 유럽의 문화에 대한 공감도 크게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이 땅에도 소재는 넘치며, 이국에는 그네들의 언어와 시각이 넘칠 텐데 왜 그리도 유럽을 소재로 한 글이 많은지 이 책의 표지에 이은 내 두 번째 불만이다. 당시에는 그러한 소재가 지식인의 유행이었던 것일까? 많고 많은 글 중에서 왜 이런 시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채택한 것일까? 시어의 운율과 느낌은 좋지만 제목을 보면 왠지 모를 서러움과 함께 불쾌함이 밀려 온다. ㅡㅡ;

마드리드의 어린 창부

마드리드에는 꽃이 없다.
다니엘 벨은
이데올로기는 이제 끝났다고 했지만
유카리나무에 피는
하늘빛 꽃은 바다 건너
예루살렘에 가야 있다.
마드리드의 밤은 어둡고 낯설고
겨울이라 그런지 조금은
모서리가 하얗게 바래지고 있다.
그네가 내미는 손이
작고 차갑다.
 



내 좁은 마음 탓인지 이국의 어린 창녀를 생각하다 불쾌해진 마음을 '소년'(25쪽)에서 찾고 싶었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라, '시집 + 에세이집'이다. 앞쪽은 시집이고, 뒤쪽은 에세이집인 것이다.
비판적인 김춘수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 나름대로 15~20년은 지난 글이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는 더욱 더 심화되었을 뿐 전혀 개선되지 않은 문제들임 읽을 수 있다.

후기산업사회를 살면서 우리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거리에 나붙은 갖가지 현수막 중에서도(무슨 놈의 현수막이 그렇게도 많은지) 몹시 시신경을 아프게 하는 것을 하나 보고, 정말이지 봐서는 안될 것을 그만 보고 말았구나! 하는 심정이 된다. 그 현수막은 '우리의 아이들을 안전하게 학교에 보냅시다'라는 글귀이다. 서울의 거리에는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이따위 현수막이 도처에 나붙어 있다. (87쪽, essay '아이들을 위한 유토피아' 중에서) 

조선시대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외규장각을 훔쳐간 프랑스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다음의 글을 읽다 보면 그 씁쓸함이 더욱 더 커져만 간다. 

훔쳐간 것은 백번 사죄하고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인간된 도리다. 그들이 곧잘 지적소유권이니 하고 자기들의 권리를 내세우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들은 남의 것을 훔쳐가도 되고 남은 자기들 것을 베끼기만 해도 안 된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양심의 마비요. 뻔뻔스러움의 극치다. 부처의 눈에는 이런 따위도 부처로 보인다고 하면 나와 같은 옹졸한 위인의 눈에는 부처가 우습게 보일 뿐이다. (125쪽, essay '부처의 눈에는' 중에서) 



비판적인 에세이 몇 편을 읽다보니 37쪽에 수록된 '개 두 마리'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아른 거렸다.
월간 에세이에 3년간 연재한 컬럼을 묶어 시인이 선별한 시들과 함께 묶어 낸 이 가볍고 편안한 책은 분명 멋지다. 화사한 그림들과 함께 편안하게 책을 보지만 덮어두면 표지가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시 한 번 아쉬움 생각, 시집은 특히 표지가 예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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