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류시화는 단순한 시인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질투를 하는 이들도 많지만 어쨌거나 그의 시와 에세이와 노래, 번역물들은 만능엔터테이너로서 류시인을 증명한다.
1991년에 푸른숲을 통해 발표한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를 가장 빛나게 한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이 시집을 세 권이나 갖고 있었는데... 가장 낡고 가장 오래된 1991년판 한 권만을 남겨 두고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했다. 다른 모든 소유가 그러하듯 여러 권 있느니 보다 단 한 권 있을 때 그 시집은 더욱 빛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가장 오래된 시집의 출처를 알아보니 국민학교 1학년때 내 짝꿍이던 영숙이가 집에 소장하던 낡은 시집 몇 권을 보내준 묶음 속에 있었던 시집이었다. 시집을 펼치자 1쪽과 2쪽에 해당하는 첫번째 장의 일부가 찢겨 있었다. 영숙이 나에게 보내오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 것으로 보이는데, 찢겨 나간 종이 자체도 운치가 있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책 제목과 같은 이 詩를 외노라면 쓸쓸함과 함께 나른한 행복이 밀려 온다.
이 시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찍은 8년 전 4월8일(결혼 10개월 전)의 사진이 생각난다.
연애 시절 에버랜드에 들렀을 때, 선영이 형이 우리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은 장면인데, 어쨌거나 나는 이 순간에 그녀가 곁에 있어도 그리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 했었고, 이후로도 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되뇌며 그녀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집 29쪽에 있는 '나무'라는 시가 좋다.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또한 이 시집에도 류시화의 시라기 보다도 가수 안치환의 노래로 더 많이 알려진 '소금 인형'이 있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가라앉은
소금인형 처럼
그대의 깊이를 알기 위해
그대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 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그렇게 읽으면 마음 편하고, 연애할 때 인용하기 좋은 주옥같은 시들이 이 시집 한 권에 있다.
내가 소장한 1991년판 가격은 2.500원인데, 100쇄를 넘긴 2001년 판에서 5,000원, 2008년판은 어느새 7,000원이 되었다.

이런 시집 한 권쯤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자주 펼쳐보는 것도 낭만일 듯 싶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시집은 특히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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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갖고 있는 건 1997년 2월 64쇄로군요.
언제 어디를 펼쳐봐도 좋지요.^^

동탄남자 2009-09-27 09:31   좋아요 0 | URL
뭔가 통하는군요. ^^ 이런 시집이 더 많이 팔리는 사회일수록 삽질도 줄고, 잔혹한 사건들도 거의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