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 떨림, 그 두 번째 이야기
김훈.양귀자.박범신.이순원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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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략)
그해 여름에 비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 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당신의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당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정맥이 숨어드는 죽지 밑에서 당신의 겨드랑 살은 접히고 포개져서 작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찻잔을 잡느라고, 책갈피를 넘기느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느라고...(김훈)-80~81쪽

나는 그 이야기로 소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그 소설로 작가가 되었다. 내 등단작을 탄생하게 해 준, 나는 그 여자에게 빚이 있는 셈이다. K에게 역시.
한밤에 벨이 울릴 때면 나는 아직도 그 여자를 떠올린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묻던 그 음성. 내 남편을 만난적이 있나요······ 짜릿하지 않은가. (서하진)-211쪽

그리고 나서 두 달쯤 지난 다음 다시 할머니가 오셨어요. 지난번처럼 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아침 그 시간에 말이죠. 이번에도 지난번에 쓰던 그 방을 부랴부랴 청소를 해 내드렸죠. 그냥 참 별 일이다. 그렇게만 여기고요. 할머니는 보따리를 놓고 나가 한참 후에 다시 할아버지를 데리고 들어오고요. 이번에도 네 시쯤 돼서 함께 나가고요. 방은 말끔히 치우느라고 하긴 했는데 다시 쓰니까 음식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고요.
자주 오면 한 달에 한 번쯤, 그러지 못하면 두 달에 한 번쯤 그렇게 두 노인 분이 우리집을 드나들었답니다. (이순원)-231~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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