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갈나무 투쟁기 - 새로운 숲의 주인공을 통해 본 식물이야기, 개정판
차윤정.전승훈 지음 / 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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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명 없이 몇 번 얼굴 마주쳤던 지천명의 노동자 한 사람이 이 책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사람 다시 봐야겠네. 늘 이렇게 멋진 책을 보시나?"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칭찬으로 들리는 언어와 그럴때나 걸맞는 시선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정말 멋진 책이고, 책 때문에 나는 칭찬까지 받았다. 하지만 제법 훌륭한 내용임에도 그에 반하는 촌스러운 표지디자인이 약점인 책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처음 배달되어 왔을 때에도 창고 깊숙한 구석에서 겨우 찾아 보낸 책인 듯 이물질이 많이 묻어 있는 등 책의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께서 도토리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난 결코 이 멋진 책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부부가 공동으로 집필한 나무가 주인공인 책이다. 그것도 신갈나무가 주인공이다. 왜 하필이면 참나무가 아니고 신갈나무인가? 누군가 내 집안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그 제목을 그냥 '한국인 이야기'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상당히 황당할 것이다. 참나무는 진짜 나무임을 뜻하는 아주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참나무란 이름의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나라 산림의 아주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실로 이 땅의 주인공인 참나무류가 바로 신갈나무 이기 때문에 책의 제목이 '신갈나무 투쟁기'인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에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나무는 소중하니까~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도 이렇게 시작 하듯이 이 땅의 사람들은 소나무를 귀하게 여겼었다. 소나무 스스로도 주변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사악한(?) 기운을 발산하지만 사람들이 나서서 소나무 이외의 나무들은 꾸준히 제거하거나 혹은 농사지을 땅이 필요해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물론 신갈나무 말고도 피해를 본 나무는 많았겠지만 소나무가 아니었더라면 생태학적으로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갈나무이기에 더욱 억울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박해의 굴레는 이제 끝났다. 사람들의 관심이 바뀐 것이다. 이제 순리에 따라 나무의 생존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극적인 것이 남산의 소나무 숲 쇠퇴와 신갈나무 숲 확장을 예로 들 수 있다. 현재 소나무에 이어 전국 분포율 2위인 신갈나무는 우리나라 숲 대부분에 골고루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갈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들과 함께 참나무류의 기본 6수종을 이루는데, 이 모든 참나무류의 열매를 도토리라 부른다.



▷ 18쪽에 있는 공동저자인 전승훈 선생님의 학교 제자가 그린 본문 그림...

이 책이 제기한 투쟁의 역사는 소나무의 틈새에서 제 본능대로 자라지 못하고 갈라지고 뒤틀린 볼썽 사나운 외모로 꿋꿋하게 살아온 어미로부터 시작된다. 억세고 굳건한 이파리 틈새에서 가을볕에 그을린 열매가 휑한 구멍들만 남겨 놓고 떨어져 나와 상승기류를 타지 못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도토리들이 있다. 함께 떨어져 나온 도토리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걱정할 여유도 없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는 수 많은 도토리들...
어미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흙으로 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어떤 도토리는 나무가지에 걸릴 것이며, 어떤 도토리는 바위나 돌틈에 머무를 것이며, 어떤 도토리는 다람쥐나 청솔모의 먹이가 될 것이며, 어떤 도토리는 아예 묵이 되어 인간의 내장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일단 어미의 가지나 바위 틈에 걸려 있다가도 바람이나 다른 외부 요인에 의해 제2의 기회를 갖게 될 도토리도 생겨날 것이다. 함정인지도 모르고 썩은 통나무 껍데기에 뿌리를 내리는 씨앗처럼 불행한 시작도 있을 것이다. 간혹 토양화 과정의 썩은 껍데기에 뿌리를 내린 씨앗 중에 용하게도 살아 남은 나무들이 있는데, 숲에서 아치형으로 벌어진 뿌리를 가진 나무가 바로 그런 질긴 놈들이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도토리로부터 시작된 신갈나무가 싹이 난 지100일이 되었을 때, 13세의 청년으로 자라 숲에 적응해 가는 과정, 꽃을 피우고 스무살이 되었을 때, 봄·여름·가을·겨울을 여러차례 경험 하면서 어느덧 숲의 주인으로 성장한 쉰 살 무렵, 아쉽지만 곧 생을 마감하게 될 100세에 이르렀을 때 삶을 회고하는 모습 등 신갈나무의 속 마음을 글로 표현한 멋진 일대기이다.

신갈나무의 이야기지만 인생사 여러가지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문장들은 크나 큰 매력이다. 세상에 던져진 도토리가 엄마를 그리워 하는 모습에서 싸한 모성애를 느낄만한 여성 독자들이 넘쳐 날 것만 같다. 그 이치를 두고 당장은 부모가 그리울지라도 혼자서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진리 마저 엄마 신갈나무의 관점으로 표현한다. 이기주의에 물든 엄마와 마마보이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멋진 교양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자기개발 서적이기에 앞서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학자의 식물 이야기이라는 점 잊지 말아야 한다. ^^

결코 두껍지 않은 256쪽에는 신갈나무 투쟁의 이야기 글은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히 협찬받은 몇 개의 그림과 200장이 넘는 사진이 알차게 정리되어 몰입에 도움이 된다. 신갈나무 중심의 이야기를 벗어나 참고가 될만한 글들은 별도 색상의 상자글로 30여편 별도 구성해 두었으므로 숲과 식물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데 상당히 좋은 참고 서적이란 점에서 추천할만 하다.

읽다가 밑줄 그은 기억에 남는 몇가지 상자글을 메모해보니 다음과 같다.

○ 소나무가 첫 가지가 나오기까지 약 5년이 걸리는 까닭에 15마디의 소나무는 20년생 정도 된다는 이야기
○ 오래된 소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해보니 일제 강점기 동안 폭이 매우 좁아 민족의 아픔을 나무가 외면하지 않았다는 견해
○ 나무에 심을 박아 나이테를 측정하는 생장추 이야기
○ 단풍에 대한 인간의 난리법석 피우기에 보내는 예리한 조소
○ 궁핍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온 탓에 단풍이 별볼일 없는 신갈나무
○ 썩지 않는 낙엽에 대한 개인적 질문에 대한 힌트
○ 도시 나무의 배애, 청소부가 쓸어가는 낙엽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
○ 나무가 살찌는 방향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목질을 밀어 넣는 과정이라는 이야기
○ 목재는 나무의 속조직이며, 속이 상한 나무에 콘크리트로 채우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
○ 높은 당도로 인한 탈수 문제와 서리 맞은 감이 달다는 평범한 진리로 온실제배 비판
○ 도장지(徒長枝) 문제점, 비료가 망치는 나무의 저항력, 한겨울보다 꽃샘추위가 더 치명적인 나무
○ 질소 많은 참나무 분해에는 30년, 질소 적고 탄소 함량이 높은 소나무 분해에는 10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

난 참 나무를 모르고 살아온 것 같다. 이번 독서가 순식간에 나를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무와 식물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일 안하는 국회를 식물국회라 하고, 의식 잃은 환자를 식물인간이라 부르는 걸 싫어 한다는 신갈나무의 이야기는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짧은 詩를 생각나게 한 강한 임팩트의 명연설문이 아닐 수 없다.

초판 본의 촌스럽고 볼품 없던 표지가 개선되어 새롭고 이쁘게 출간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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