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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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200권을 끝내고 한동안 멀리 했던 민세문집이 순식간에 214권째 작품을 발표했다.
다른 출판사에 비해 교정 교열이 매우 낙후된 민음사답게 눈에 밟히는 오자와 오타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서머싯 몸의 특유의 글발이 충분한 즐거움을 주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글이 마치 프롤로그처럼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일종의 자유로운 형식의 성공담이며, 소설이라고 규정하기 난해한 서머싯 몸의 명품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일방향으로 규정짓지 않고 때로는 천사처럼, 때로는 악마에 가깝도록 자유로이 묘사하는 냉정하면서도 인간적인 시선이 매력적인 글을 읽노라니 제목이 왜 '면도날'인가에 대해 망설임 없이 동의할 수 있었다.

훗날에 되새김질할 기억에 의미를 두고, 문맥을 따라 매우 이기적인 후기를 정리해본다.


"3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는데 말이야. 지위나 재산, 주변 조건 등을 적당히 고려해서 결혼하는 것이 사랑만 가지고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법이야. 세상에서 유일한 문명국인 프랑스에 살고 있다면 말이지. 이사벨은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레이와 결혼할걸. 그리고 한 1~2년쯤 지나고 나면 이사벨은 래리를 애인으로 삼을 거고, 그레이는 유명한 여배우 하나쯤 호화로운 아파트에 들어앉히게 되겠지. 그러면 모두 나름대로 행복해지지." (54쪽)

이사벨의 외삼촌인 신사 엘리엇은 직업도 없는 래리를 사랑하는 조카딸을 비꼬며, 그녀가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인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해야만 한다는 것이 현실에 부합한 것이라며 여동생에게 농담처럼 조언한다. 엘리엇과 친분이 깊은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운 청년 래리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처럼 보여.” (82쪽)


선문답... 래리가 공군으로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지울 수 없는 상처에 대해 늘 스스로 삭히던 모습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이사벨에게 무심코 고백하며 슬픈 미소를 짓는다. 한참 일해야 할 나이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청년... 사랑하는 약혼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청년의 방황...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

- 중략 -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그런 질문을 던져 왔다는 것은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게다가 답을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다양한 대답들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는 대답을 찾아냈어. 예를 들어 로이스부르크처럼.” (117쪽)

시카고를 떠나 파리에 온 래리를 만난 이사벨...
그녀는 현실적으로 무가치해 보이는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 다른 하는 일 없이 삶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찾아 가며 오로지 이것저것 돈안되는 공부만 하는 약혼자에게 실망하여 질문을 던졌고, 래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들은 항상 사랑했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곳은 늘 달랐던 것일까?


“사랑은 항해에 서투르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면 약해지지. 이사벨과 래리 사이에 대서양이 놓이게 되면, 배를 타기 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아픔도 실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거야.” (160쪽)

엘리엇의 예고처럼 이사벨과 래리는 안타까운 이별을 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파혼 소식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이사벨을 위로 하고자 몸이 던지 말은 괴로운 이들에게 바다가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한 조언이었다. 결국 이사벨은 외삼촌의 예언에 부합하게 평소 그녀를 짝사랑했던 래리의 친구인 그레이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그들의 결혼 생활은 1929년10월23일 대공황과 함께 찾아오고, 몸은 런던에서 그들의 몰락을 접한다. 비록 재정적으로 몰락한 그들 젊은 부부라도 금슬만큼은 흔들림 없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보기 좋은 부부애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래리를 사랑해?”
“미치도록요. 평생 다른 사람은 사랑해 본 적도 없다구요.”
“그런데 왜 그레이와 결혼했지?”
“결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레이는 저한테 푹 빠져 있었고, 엄마가 원하시는 일이기도 했어요. 전부들 래리와 헤어진게 잘한 일이라고 했죠.” (269쪽)

 
냉혹하고 현실적인 이사벨의 고백은 과거의 래리에게도 불행이지만 현실의 그레이를 가엾게 하는 말이다. 그 옛날 래리와 약혼이 깨지기 전 그녀의 순수한 모든 것들이 이미 멀리 떠나버린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없이 청순했던 그녀의 변신에 놀람과 동시에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무척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까.


“정말 인정머리들 없습디다.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전부들 지겹단 말입니다. 내가 파티를 열 때는 그렇게 야단스럽게 나를 치켜세우더니 이제 늙고 병이 드니까 필요 없다 이거지요. 제가 앓아누운 후로 병문안 온 사람은 열 명도 안 되고, 이번 주 내내 받은 거라곤 초라한 꽃다발 하나가 전부입니다.” (380쪽)


에드나의 가장무도회에 초대받지 못한 엘리엇은 화려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결국 눈물을 흘린다. 인생무상...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말을 듣지 않는 이 병석에 누워 있는 노신사를 위해 몸이 선택한 것은 아름다운 거짓 행동을 하게 된다.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리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중략 -
“더러운 할망구.” (397쪽)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지막 품위를 위해 몸에게 자신의 유언을 구술하는 엘리엇...
멀리서 달려오는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 이사벨을 대신하여 몸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 주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드나를 향한 거친 욕설이 사교계를 주름잡던 노인의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렇게 그는 결코 얄밉지 않은 귀족의 삶을 살다 떠났다.



"이젠 너무 늦었어요. 제가 결혼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여자는 죽은 소피밖에 없거든요."

나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그 많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소피는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여자였어요. 열정적이고 야심차면서도 너그러운······. 그녀가 지향한 이상들은 고결한 것들이었죠. 결국 파멸로 향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비장한 숭고함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487쪽) 

소피의 장례식이 있던 툴롱에서 래리가 화자인 몸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난해하고 일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이사벨, 난 부도덕한 사람이야.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긴 해도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거든. 이사벨도 나름대로 나쁜 여잔 아니야. 게다가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잖아. 그 아름다움이 완벽한 취향과 가차없는 결단력이 합쳐진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너를 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순 없어. 이사벨은 딱 한 가지만 더 갖추면 완벽하게 매력적이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로 따뜻한 마음씨야."
(501쪽)


그렇게 사람을 몰아부치면서도 결국엔 위로해주는 매너를 가진 몸. 이사벨은 냉정한 몸의 시선에 몸둘 바를 모르며 흥분하고 불쾌해 하다가도 그의 마지막 배려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신뢰하는 사이였다.


그 뒤로 나는 뉴욕에서 택시를 탈 때마다 운전수를 흘끗흘끗 보는 버릇이 생겼다. 래리의 진지한 미소와 움푹 들어간 눈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나 끝내 마주치지 못했다. 이후 전쟁이 터졌지만, 그는 나이가 많아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에서든 외국에서든 트럭을 한 번 더 몰고 있을 수는 있다. 어쩌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가 시간에는 책을 쓰면서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들과 동포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탈고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하다. 그에게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어느 면으로 보나 여전히 청년이니까 말이다.

(514쪽)

멋지다.
참으로... 멋진 희망이다.

몸은 더 나아가 마지막에 모두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고 살았던 이 이야기를 행복한 성공담으로 규정한다.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유산을, 그레이는 새로운 사업을, 수잔 루비에는 안정적인 남편을, 소피는 비록 비참했지만 죽음을, 래리는 멋진 책과 멋진 인생을... 독자에게는 읽는 즐거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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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남자 2009-07-17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241쪽18줄 제산, 267쪽15줄 어느, 328쪽8줄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