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머리 속에 관타나모가 맴돌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그냥 멍하게 기다리던 신호등 앞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던져지는 단어는 '관타나모'였다. 그저 뉴스로 스쳐가듯 인식하던 관타나모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던 내게 끊임없이 각인되던 관타나모... 이쯤되면 책벌레로서 관타나모에 관한 책을 한 권쯤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 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1903년에 미국이 쿠바로부터 영구임차한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911테러 이후, 지금까지 800명 가까운 테러용의자가 수용되어 있는  인권의 사각지대이다. 이 책은 파쉬툰 출신 미국이민자 출신의 로스쿨 여학생의 체험수기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가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라난 지적이고 아름다운 동양의 아가씨가 주로 부모님의 나라에서 붙잡혀 온 무슬림들이 아무런 증거없이 인권을 유린 당하며 생활하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현장을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바로 그런 취재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처음 탄 관타나모행 비행기는 플로리다 남동부의 작은 도시(포트 로더데일)에서 출발했다. 똑바로 설 수도 없는 조잡한 10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로 관타나모까지 직선 거리 140Km지만 쿠바영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무려 3시간이 비행해야 했고, 화장실도 없어서 곤혹스러운 추억을 제공했다. 국방부에서 발급한 신원조회 증명서를 제시하고 그 비행기를 처음 타던 날, 구명조끼를 찾지 못해 긴장한 그녀에게 동행한 변호사 피터는 "괜찮아요. 비행기가 추락하면, 구명조끼 따윈 아무 소용이 없을테니까."라는 말로 위로하고,  그녀는 역설적인 안도를 하고 떠난다. 그녀가 약혼자의 지원을 받아 도착한 관타나모는 생각보다 심각한 곳이었다.

미국 정부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미국의 재판관할권 밖에 있는 외국인이므로 미국 법률상의 권리가 거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오래지 않아, 관타나모에 있는 이구아나조차 <멸종위기 동식물법>이라는 미국 법률에 따라 보호받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관타나모 기지를 벗어나 쿠바 땅으로 넘어간 이구아나는 사람들에게 곧장 잡혀 먹혔지만 관타나모에 있는 이구아나는 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연방 공무원을 비롯해 이구아나를 해치는 그 누구라도 처벌받을 수 있었다. 결국 관타나모에 있는 수감자들은 이구아나 만큼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다. (49쪽)

소아과 의사 무소비, 누스랏 노인과 아들, 염소치기 청년 하즈 등을 만나면서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도저히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없는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이 관타나모의 야생동물 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음에 그녀는 슬슬 분노한다.

관타나모를 체험한 그녀의 글의 뉴욕타임스에 기고되자, 기지 사령과 해리 해지스 제독의 까칠한 편지가 도착한다. 그녀는 관타나모 기지 사령관의 질책이 담긴 공격성 편지를 영광으로 생각하며 영예롭게 받아 들이며, 그 편지를 액자에 담아 화장실 변기 위에 걸어두는 여유를 부린다. 재치 있는 저자가 한 없이 멋스럽게 느껴지던 순간이다.

보다 진실을 찾고 싶었던 그녀가 관타나모 기지에만 머물지 않고, 아프카니스탄을 직접 방문하려 했을 때 식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반대하지만 아무도 이 용기 있는 미녀를 막아내진 못한다. 그런 그녀가 30년 가까이 사랑했던 미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 어버이의 나라 아프카니스탄에 도착했을 때 동행했던 무니르는 분통을 터뜨린다. 이미 그곳은 미국인들이 주인이었던 것이며, 미군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194~195쪽에 수록된 그녀의 정리한 비열한 용어들이다.

강화된 심문기술 → 고문
조종받은 자해행위 → 자살
자발적 금식 → 단식투쟁
금지물품 → 꽃, 머리핀, 빨대, 플라스틱 스푼, 스테이플러
인도 → 납치
보조급식 → 단식투쟁 수감자의 코에 튜브를 꽂아 강제로 먹이기
비대칭 전투 → 자살
편의 아이템 → 비누, 휴지
여가활동 → 감방 안에 공 넣어 주기
고가치 수감자 → CIA에 비밀리에 수감되고 고문당한 사람
쿠바, 관타나모 → 미국

더 나아가 팬타곤 대변인 고든과의 대화를 정리하는 그녀의 센스가 돗보인다.

고든과 나는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한 건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미군이다. 이상한 건 수감자 하나당 5,000~1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주었던 이이다. 더 이상한 건 금전적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현지인들의 고발 내용을 먼저 조사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잡아온 미군이다. 이상한 건 기소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5년 이상 억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건 자살한 수감자들의 시신을 고향에 보내주기 전에 조직을 제거한 미군이다. 이상한 건 팔십 먹은 노인을 '적 전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상한 건 미군병사들이 코란을 똥통에 던지는 동안, 행정부가 미국 헌법에 대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0쪽) 

이 모든 고통의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는 일종의 해피엔드다. 그것은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관타나모 수용소를 빠른 시간 내에 폐쇄하겠다는 조치 때문이 아니다. 무소비 박사의 행복한 귀환, 아들을 관타나모에 남겨두고 먼저 귀환한 누스랏 노인의 이야기... 누스랏 노인은 목수술을 위해 미국에 가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작가는 그것을 농담이라 생각한다. 설마 그 악독한 미국으로 가서 수술을 하고 싶다는 말인가?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는 작가에게 말한다.

"왜 안 되오? 나는 미국이나 미국인을 싫어해본 적이 없소. 나는 그들을 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나는 그들을 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들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나를 배반한 것은 아프카니스탄이었오요. 바보 같은 미국인들은 거짓말만 믿고 조사를 하지 않았던 거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미국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아프카니스탄에 와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던 게지. 내 진짜 적은 나를 미국인들에 팔아먹은 일부 양심 없는 거짓말쟁이 아프카니스탄들이오." (307쪽)

내 무의식을 흔들던 관타나모...
파쉬툰의 전통을 심어주고 싶었던 부모님에 반하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미국인으 생각하고 성장한 아름다운 그녀, 마비쉬 룩나사 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재치가 돗보이는 멋진 글을 읽었다.

표지는 별 볼일 없었지만, 환하게 웃는 그녀의 글답게 경쾌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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