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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는 순서 ㅣ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깊은 밤, 정리하지 못한 것이 있어 책상에 앉아 있는데, 건너방 서재에 이불깔고 누워 있는 아내가 자신을 기쁘게 해달라고 한다.
아내가 누운 머리맡 동쪽 책장에서 시집을 한 권 빼들어 아무 쪽이나 펼쳐서 목을 가다듬어 읽어준다.
아무렇게 펼쳐서 읽어 주는데 '눈물의 횟수'라는 시가 들어 왔다.
사람 시늉, 애인도시, 문밖의 문, 첫눈, 바다의 권유, 질, 고통을 달래는 순서...
깊은 밤 차분하게 깔리는 나의 저음에 새근새근 잠드는 아내...
내가 시집을 덮으니 눈을 뜨고 다시 계속 낭독해 달라고 한다.
내가 무작위로 펼쳐서 읽었지만 특별히 읽어 달라고 주문한 제목은 '애인도시'였었다.

그렇게 계속 무작위로 시집을 읽어주다 보니 어느새 모두 다 읽어 버렸다.
모든 시가 멋지다. 외면하고 싶은 시가 하나도 없는 멋진 시집이다.
내가 잠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시는 '멸치'였다. 다음과 같은...
잡아도 잡아도 멸하지 않는다 하여 멸치라 했다 한다.
그렇다면
연보랏빛 오월의 라일락나무들고 멸치다
유월 담벼락에 온통 줄도장 찍는 중장미들도 멸치다
그때마다 자궁 속 다시 나오고 싶은 여자도 멸치다
그 밤마다 치마 속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남자들도 멸치다
저 파닥이는 흰구름도 빗물도 빗물 적시는 먼지도
무엇이든 다 매만진다는 세월도 추억도
다들 단도처럼 반짝대는 멸치다
당신이라는 세상, 그 수상한 것만 빼면
며칠 전 주문한 시집인데, 초판 발행일이 2008년12월29일로 되어 있었다.
김경미 시인이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