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100년간 전 세계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은 11살 짜리 소녀가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찾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소녀의 행복한 성장소설은 그녀가 어머니로 할머니로 살아가는 과정을 빠짐없이 추적하면서 많은 행복감을 안겨줬다.

이제 빨강머리 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재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류작가 버지 윌슨이 11살 이전의 앤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픔에서 희망으로의 연결고리가 되고자 기획되었던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문장으로 시작하여 기대를 한껏 이끌어 낸 이 책은 처음부터 호평을 받기 쉽지 않은 불가피한 용두사미의 기획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앤의 팬들에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추적하여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는 제법 유쾌한 일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가족 없이 외롭게 살아온 매력적인 외모의 버사는 키 크고 적갈색 머리 휘날리는 청년 월터 셜리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PEI의 바로 남쪽에 자리한 노바스코샤 주에 있는 볼링브로크 고등학교의 동료 교사였으며, 그곳 조그만 노란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이듬 해 3월5일, 행복이 넘치는 조그만 노란 집에서 아빠를 닮아 마디마디가 길쭉하고 주황색 곱슬 머리의 못생긴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 집안 일을 돌보던 조애너와 가까운 이웃인 제시 글리슨은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해 준다. 3개월 후에 마을에 열병이 퍼지고 불행하게도 제시의 막내딸 제니가 죽고, 버사마저 열병에 옮아 죽는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월터마저 나흘 후에 죽고 만다. 제시는 죽은 제니를 생각하며 앤을 키우고 싶어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남편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조애너는 셜리 집에서 봉급도 못받았지만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 행복 했노라며 남편 버트 토머스를 설득하여 앤을 데려다 키우게 된다.
남보다 일찍 말문이 트이고, 생각이 깊으며 매사 긍정적인 앤은 갖은 학대에도 자신을 거둬준 토머스 부부에게 감사하며 집안 일을 돕는다. 부모님이 사용했던 책장 속에 접시를 정리하던 앤은 상상 속의 친구 케이티 모리스를 만들어 사귀게 되고, 토머스의 큰 딸 일라이저는 앤에게 강한 모성본능을 느끼며 자신이 결혼하면 앤도 데려가려고 마음 먹었지만 결혼 상대자인 로저는 앤을 원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고민하는 딸에게 말한다.

"로저와 함께 가거라. 네가 앤 때문에 여기 남아 보잘 것 없는 남자들이나 찾아 온다면 너는 분명 쭈글쭈글한 노처녀로 남아 앤을 미워하게 될 거다. 네 엄마가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남게 된다면, 날마다 엄마를 미워하게 될 거야. (중략) 앤 말이다. 내가 그 애를 잘 지켜주마. 그 애한테는 뭔가 특별한게 있어. 참으로 강한 영혼을 지닌 아이야. 난 그게 감탄스럽다. 내 자식들한테 화내는 것처럼 그 애한테 화내지 않잖니. 겨우 다섯 살인데 그 애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중략) 하지만 그 아이가 날 미워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더구나. 일라이저." (108쪽)

한동안 철도역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버트 토마스는 6개월만에 옛버릇 되살아나 해고되고, 집안은 다시 난장판이 된다. 앤의 고민을 들어주던 상상 속의 친구 케이트 모리스가 살고 있는 책장의 한 쪽 유리문도 토머스가 부셔버린다.

토머스는 새 직장을 찾아 메리스빌로 이사를 간다. 이사 가기 전에 찾아온 제시 글리슨은 6년 만에 처음으로 앤과 인사를 나누고, 조애너에게 앤을 데려가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서머스라는 공무원이 찾아온 것을 계기로 앤은 봄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일라이저가 전에 읽어주던 '로열 리더' 두 권을 선물 받는다. 조애너는 집안 일을 부리는데 방해가 될까봐 앤이 입학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조애너의 심부름으로 마을에 달걀 사러가는 앤은 주황색 집에 사는 마음씨 좋은 아치볼드 부인을 만나 차와 쿠기를 대접 받고, 나중에는 생일 선물로 파란 리본도 선물 받는다. 아치볼드 부인의 소개로 존슨 씨에게서 달걀을 샀는데, 지저분하고 까칠하며 무섭게 생긴 존슨 씨는 전직 교사였으나 과거의 상처를 씻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하던 노인(?)이었다.
존슨은 친밀감이 넘치는 앤을 통해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친해진다.

여섯 살에 입학한 작은 학교의 제이니 헨더슨 선생님은 초급반부터 상급반까지 열여섯 명의 전교생 모두를 가르치는 분으로 알고 보니 아치볼드 부인의 조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공부를 가르치며, 열심히 하는 앤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직장에서 또 사고를 치고 돌아온 버트 토마스 때문에 학교를 관두게 된다.
시련의 세월을 보내는 앤에게는 케이트 모리스 말고도 좋은 친구와 보물들이 있어 힘이 된다. 헨더슨 선생님이 빌려준 게인즈 버러의 '푸른 옷을 입은 소년' 그림 버너드, 토머스씨가 화해의 의미로 선물한 곰 인형 보리스와 언젠가 쥐를 잡으려고 데려온 주황색 고양이 라킨바가 바로 친구이자 보물들인 것이다.
서머스씨의 노력으로 다시 학교를 찾게 된 앤은 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멋진 선물을 받는다. 아치볼드 부인은 초록색 리본을, 헨더슨 선생님은 5센트 동전 두 닢이 들어 있는 연분홍색 수제 지갑을, 존슨씨는 직접 디자인하고 색칠한 예쁜 달걀 껍데기 액세서리를...

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고 얼마 후, 밤에 파티에 갔던 버트 토머스가 열차 사고로 사망한다.
버트의 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들은 물론 말과 소, 케이티 모리스(장식장)까지 모두 데려 가면서 빨강머리 소녀는 외면해 버린다.
오갈 곳이 없어진 앤은 쌍둥이를 넷이나 낳은 강 위쪽 마을인 클레어버그의 샬럿 해먼드에게 가게 된다. 그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고아원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앤은 그 집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앤이 떠나갈 때 존슨과 헨더슨 선생님은 결혼 소식을 전해준다. 처음에 아주 꾸미지 않고 수염이 덥수룩한 채로 은둔 생활을 했던 존슨 씨가 앤에 의해 마음을 열고 이렇게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앤은 토머스의 막내 아들 노아에게 이별 선물로 그의 아빠로부터 받았던 보리스(곰 인형)를 선물한다. 앤은 주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베풀 줄 아는 사랑의 소녀였다.

클레어버그에서 새롭게 시작한 앤은 메아리 친구 '비올레타'를 사귀게 되고, 이웃에 살고, 해먼드의 출산을 돕던 뚱뚱한 노처녀 할머니 '해거티 양'과도 친해진다. 전학이라 할 수 있는 그곳 학교에서는 맥도걸이라는 서른다섯 살의 정이 넘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지리수업 시간에 사면이 온통 바다인 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가 어딘지 아느냐며 질문하고 그 정답을 칠판에 적는다. 다음과 같이...

프린스에드워드 섬

"여긴 아주 아름답단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초록빛을 띤 작은 들판이 있어. 조그맣고 하얀 농가들은 흙이 아주 비옥하고 두꺼워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감자를 생산해내지. 그건 빨간색이야!" (405쪽)


그렇게 시작된 맥도걸 선생님의 PEI 예찬은 모든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게 되고, 특히 앤은 그 섬에 대한 깊은 동경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이 외동 아들이라 외롭게 자랐던 해먼드씨는 많은 자식을 낳는게 꿈이었는데, 과유불급... 앤이 도착한 얼마 뒤에도 아내가 또 쌍둥이를 낳자 한 숨을 쉰다. 여덟 명의 아이들과 아내와 앤을 먹여 살릴만큼 나무를 자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더욱 열심히 일을 했던 해먼드는 어느 날 통나무를 나르다가 고꾸라져서 심장이 멈춰버린다.

다시 한 번 갈 곳이 없어진 앤은 그토록 싫은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로 결정 되고, 맥도걸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중에 보았던 PEI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선물 받는다. 그는 앤이 PEI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 마음에 자신의 서랍에서 사진을 한 장 훔쳐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별의 선물로 더욱 많은 사진들을 가져왔던 것이다. 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코트 주머니에 몰래 넣어져 있던 그 때 훔쳐간 그 한 장의 사진이 그를 더욱 기쁘고도 슬프게 만든다.

라슨 부인을 따라 기차를 타고 호프타운 고아원으로 가는 앤에게는 토마스 부인에게 물려 받은 금속 가방만 달랑 하나였다. 그 가방 속에는 앤이 간직해 온 수 많은 보물이 들어 있었다. 고아원의 관리자인 칼라일 양에게 뺏기다시피 작은 천 가방과 바꿔야 했던 앤은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한다. 먹을 것도 친구도, 옷도 부족하고 이제는 위안이 되어준 보물들마저 없지만 그나마 빨강머리를 칭찬해 주던 에드너를 사귀다가 뒤통수까지 맞는다. 고단한 고아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산다는 스펜서 부인이 고아원에 찾아와서 말한다.

"나는 다섯 살 난 작고 예쁜 여자애를 데려가고 싶어요. 그리고 내 친구들인 커스버트 남매를 위해서는 열한 살쯤의 일 잘하는 아이 하나를 데려가려고 합니다." (522쪽)

그 한 마디로 앤은 일 잘하는 아이로 평가받은 지난 4개월을 보상 받았다. 칼라일 양은 영향력 있어 보이는 스펜서 부인을 위해 정말 일 잘하는 빨강머리 앤을 추천했다. 그렇게 열차를 타고, 배를 타고,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노섬벌랜드 해협 반대편에 남기고 떠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


처음에 언급했듯이 잘해봐야 실랄한 평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시도였던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주 많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을 공부하지 않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호프타운 고아원의 칼라일 양의 실수로 11살 남자애 대신 여자 아이인 앤이 커스버트 남매에게 보내지게 되었다는 설정이나, 빨강머리 앤이 훗날 마릴라에게 고백하는 것보다 2년이나 일찍 시작한 학교 생활, 훨씬 많았던 학교생활, 한 번도 소풍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빨강머리 앤이 토머스씨 가족과 함께 해변으로 떠났던 8월의 마차 여행, 한 번도 기도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빨강머리 앤이 침례교회를 따르는 호프타운 고아원에서 첫번째 수업으로 기도를 했던 점, 빨강머리 앤이 브라이트리버 역에서 매슈를 처음 만날 때 들고 있던 가방이 호프타운 고아원에서 바꾸기를 강요했던 천가방은 아니라는 점, 여덟 쌍둥이네 생활이 모드 소설 속 앤의 고백만큼 고달프지 않았고 행복했던 점 등이 내 눈에 옥에 티가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점들이 만약 보다 즐거운 소설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경쾌함 보다는 우울함과 측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존슨과 헨더슨의 사랑도 어설프게 완성되어 버렸기에 아쉽다.

또한 고독한 앤의 벗이 되어주는 선물과 친구들인 버너드, 보리스, 라킨바, 동전이 든 연분홍 지갑, 달걀 액세서리, PEI해변의 사진 등은 ‘케이티 모리스’만큼 빛나는 활약을 하지 못할뿐더러 소설 후반부에 유야무야 사명을 다하지 못하거나 100년 전 탈고된 작품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무의미함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다듬고 다듬는다면 좋은 이야기가 될만큼 작가의 기본적인 정성은 들어갔다고 본다.

버지 윌슨이 요새 잘 나가는 작가라지만 근본적으로 빨강머리 앤에 온 정열을 기울일 수 없는 배가 부른 작가라는 점과 할머니의 문학작품이 물려준 지적재산권으로 인해 남부럽지 않은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후손들에게 참으로 불만이 쌓이는 독서였다. 그들이 보다 정성껏 기획을 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의 작품에 의미 있는 100년을 잘 활용만 해먹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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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남자 2008-11-0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심해서 구글 검색으로 앤의 배경이 된 캐나지 지역을 미국국경과 더불어 간단히 편집해서 첨부해봤습니다.

loose 2008-11-21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앤이 토머스 아저씨와 우편마차를 타고 해변에 갔다는 설정은 원작 75페이지에 나옵니다. (100주년 발행본 기준)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