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에 1993년에 번역 출간 되었지만 그다지 많이 팔리지는 않은 한 천재의 단편 모음집이다.
다섯수레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신영복 감수.  이철수 판화로 편집된 호화로운 스텝의 작품이며, 명진숙 선생님의 번역도 뛰어나다.
게다가 이 책은 출간된지 오래된 탓에 비교적 책값도 저렴하고 읽기 편한 판형에 가벼운 하드커버로 고급스럽다.

작가인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 5월 5일 도쿄에서 태어나 부모의 이혼으로 3살때부터 홀로계신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시골에서  유명한 유학자였던 할아버지 나카지마 부잔(中島撫山)의 영향과 할머니의 사랑 속에 자란다. 여섯 살에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계모와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구박과 학대를 받으며 자랐으나 이를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히며 자랐다. 그러던 두번째 엄마가 죽고, 열 다섯살에 세번째 엄마를 만나고, 열 여섯살에 네번째 엄마를 만나는 등 순탄치 않은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우수한 학생으로 천재의 면모를 보여온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산국민학교 5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되고, 경성중학교(현 서울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일본의 도쿄 제1고로 전학하여 '순경이 있는 풍경'이라는 단편을 발표한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조선인의 시각으로 쓴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맨 먼저 소개되는 "산월기"는 중국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일본 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다.
본디 학식이 많고 재능은 뛰어나지만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항상 앙앙불락, 마음이 편치 못한채 살아가는 하급 관리 이징은 매사 불만투성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명망있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다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팔고 세상에 나오지만 다시 한 번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속세를 떠나 버린다.
일년 뒤 이 무책임한 사나이가 호랑이가 되어 몇 되지도 않는 옛친구 원참을 만나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수치심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겁많은 자존심이었노라고이야기하는 것이 골자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엇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다는 짧은 독백이 매력적이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닌 삶의 반성과 회한에 관한 작품이다.

두번째 소개되는 작품 "명인전"은 기창이라는 사나이가 최고의 궁사가 되기 위해 스승 '비위'를 만나 배우고, 그 스승을 위협할만큼 실력을 쌓은 다음에 새로운 사부인 감승을 찾아가 9년 동안 수업을 쌓고 하산하여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목우(나무인형)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는 더 이상 활을 잡지 않지만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겨난다. 그가 득도하여 최고 명인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는 활의 모양마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가 머무는 한단 땅에서는 당분간 화가는 붓을 감추고, 악사는 비파의 현을 끊고, 장인은 줄과 자를 손에 쥐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는 것으로 끝맺는 이 작품의 매력은 기창의 명언에 있다.

 "지위(知爲)는 행하지 않는 것이고, 지언(知言)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지사(知射)는 쏘지 않는것이다." (63쪽)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세번째 수록된 작품 "제자"를 읽기 위함이었다.
단편 '제자'는 저자인 '나카지마 아츠시'가 1942년, 서른 세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뒤 1943년 2월에 한 잡지에 실린 작품으로, 원고가 발견되었을 당시 표지에 제목이 두번 덧대어 붙여져 있었는데, 처음 제목이 '자로(子路)', 두번째 제목이 '사제(師弟)',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로 바뀐 상태였다고 한다. 이 책의 서문이자 추천사에는 다음과 같은 신영복 선생님의 해설이 있다.

이 작품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자로>라는 제명이 무리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로>에서의 ‘자로’인 것은 개인으로서의 자로가 아니라 시종일관 스승 공자와의 관계 속에 육화되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자로>보다는 <사제>라는 제명이 더 적절하다 할 수 있으며, 작가가 이 <사제>라는 제명을 놓고 고민한 점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제자’로 결정한 것은 사제 관계 그 자체가 분명 그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인 자로를 통해서 파악된 스승 공자와, 공자의 압도적인 대기권 속에서 숨쉬는 제자 자로가 함께 달성시킨 사제 관계가 인간 관계의 빛나는 전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관계’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조건이며 주체는 역시 ‘인간’이라는 작가의 인간 이해가 결국 <제자>로 제명이 낙착되게 했다고 생각된다.


자로의 도전적인 등장과, 끝까지 스승을 향한 경외심을 보여주면서도 스승 그 존재에만 의미를 두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의문으로 일면 무식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로의 생애가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나카지마는 그러한 자로의 생애를 지극히 개인의 관점으로 놓아두지 않으며, 한 인간은 홀로 온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며 관계와 관계 속에 복잡하게 규정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관찰자적 시점의 인물 묘사. 공자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자로, 공자 없이 자로를 정의할 수 없다. 자로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공자, 자로 없이 공자의 삶을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자로 보다 손 아래인 자공과 재여 또한 객관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나카지마의 분위기를 놓칠 수 없었던 이 감동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삶의 연쇄(連鎖;linkage)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철학과 공자에 관한 수많은 작품을 섭렵한 나카지마의 역작 '제자'는 간결한 문체로 인물의 특징을 단순화 시키면서 공자와 자로와의 만남과 교수, 수학 과정 등을 묘사하여 사제의 정을 보여주고, 스승보다 먼저 떠난 비운의 제자와 그러한 제자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문장은 숙연하기만 하다.

'자로의 사체가 소금절임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집안의 모든 젓갈류를 내다 버리고, 이후 일절 식탁에 젓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136쪽)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 '이능'은 한무제 때 용장으로 흉노의 포로가 되어 이국땅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영웅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자'와 마찬가지로 나카지마의 유고이나 제목이 전해지지 않아 가능한 객관적으로 이름 붙이다보니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작품이다.
이능은 명장 이광의 손자로 오천의 보병을 이끌고, 수만명의 흉노 기병과 맞서 싸운 영웅으로 무기가 떨어지고 길이 막혀도 흔들림 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사력을 다해 따르며 목숨을 바쳤을만큼 명장이다. 그가 결국 흉노 차제후선후에게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모든 신하들이 그를 비방하고 역적으로 몰아갈 때 일개 태사령이던 사마천만이 겁없이 그를 변호했다가 궁형을 언도받고 거세 당한다. 이 작품은 그렇게 서로 잘 알지 못하지만 문무 분야에서 의롭게 업적을 남긴 두 인물 사마천과 이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일을 계기로 사마천은 더욱 더 역사 편찬에 매진하게 되게 되고, 이능은 차제후선후의 목을 노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지만 그의 아들 고록고선우(좌현왕)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영원히 기회를 잡지 못한채 북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이다. 한편 이능의 친구로 역시 인질로 잡혀 있던 소무가 1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비전향장기수의 모습을 읽어낼 수도 있으며, 조국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읽어내게 한다.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아무리 뻐겨도 어차피 자신은 소나 말에게 짓밟혀 버릴 길바닥의 벌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무참히 짓밟혔지만 수사라는 일의 의의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비참한 몸이 되어 자신감도 긍지도 잃어버린 후, 그대로 세상에 살아남아 이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하기 싫어도 최후까지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인연과도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181쪽)

사마천은 자신의 아픔을 신세한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끝내 사기를 완성해 내고 연소가 끝난 나뭇재처럼 사라져 갔다.

철저하게 역사에 기반하여 창작해낸 나카지마의 이 멋진 작품은 오히려 그동안 알려진 다른 역사서 보다 더 진실된 인물의 모습을 그려냈을 수도 있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써내려간 단편 혹은 중편의 이 문학작품을 읽는 내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이 책은 중국 고사를 소재로 일본인이 쓴 작품이었기에 번역도 까다로웠을 것이며, 상업성이 썩 기대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의 멤버들이 만나 완성시킨 책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많이 팔리지 않았다.
이런 책이 나오기까지 심혈을 기울인 분들 또한 심적은 보람이 크리라 보며, 이런 좋은 책을 발견한 독자의 기쁨 또한 매우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