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 사람들

사계절출판사가 준비한 임꺽정 3부작 강연회의 마지막은 소설가이자 자전거레이서인 김훈 선생님의 몫이었다.
첫번째 강연을 맡은 이덕일 선생님이 조선조 사회의 포괄적인 분석으로 임꺽정의 활동 배경을 사실에 입각하여 설명 하셨다면, 두번째 강연은 고미숙 선생님을 통해 임꺽정 시대를 향한 부러움과 즐거움을 찾아가는 독서 여행 시간이었고, 김훈 선생님은 후배 작가의 관점에서 벽초가 일궈놓은 매력적인 문장의 발견에 초점이 맞춰진 강연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김훈 선생님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행동을 벽초의 소설 '임꺽정'에서 읽었다는 말씀으로 강연을 시작하셨다.
1928년11월21일, 조선일보에 이 소설을 처음 연재하면서 조선의 정조(sentiment, 情操)를 쓰겠다고 다짐했던 벽초의 맹세는 독자 김훈의 관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노라는 평을 받을 수 있었으며,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이 러시아의 자랑이듯이 조선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있었노라고 매우 뿌듯함을 강조하셨다.



나는 올해 초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된 제4판 '임꺽정'의 부록 '조선의 임꺽정 다시 날다'라는 책을 통해 칠장사에 관한 김훈 선생님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 글과 관련된 강의 자료를 전혀 없을만큼 새롭게 준비한 김훈 선생님이 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2008년 10월4일 상상마당에서 내가 들은 김훈 선생님께서 매력을 느낀 소설 속의 몇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봉단편

1. 이교리가 배 고파서 똥을 먹는 장면 (제1권 53~54쪽) : 이 장면에서 마치 일식(日蝕)하는 날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일만큼 배가 고픈 인간이 물컹한 똥을 손에 잡고 밥이라고 착각했다가, 똥임을 알고 실망했다가도 똥이라도 다시 돌아서서 그 속에 채 삭지 않은 보리알갱이를 씻어 먹은 후, 그나마 먹고나니 눈에 보이는 물건이 똑똑해지더라던 묘사. 물을 마신 까닭에 목은 타지 아니하나 오장이 당기기는 일반이라는 표현

2.주팔이가 글짓는 대목 (제1권 199~200쪽) : 글쟁이도 아닌 주팔이가 정작 글은 쓰지 못하고 개미를 관찰하는 장면을 보면 '개미들은 혹 혼자 따로 떨어져서 앞발로 수염을 닦달하는 놈도 있고 혹 오다가 다시 서로 만나서 수염으로 인사하는 놈도 있고 그 외에 양기를 받아서 기운을 내려는듯이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놈이 많았다.'는 문장이 있다. 벽초의 관찰력이 얼마나 세밀한가를 알게하는 문장이다.


피장편

1. 꺽정이와 운총이, 천왕동이가 표범을 잡는 대목 (제2권 356쪽) : 표범의 공격자세에 관한 정교한 묘사로  '몸을 훌훌 털고 앞 뒷발을 버티고 허리를 잘록하게 들어가도록 기지개를 켜고 그리하고 어슬렁어슬렁 등성이를 타고 내려간다.'는 표현이 매력적인데, 그 뒤에 펼쳐지는 표범의 공격으로 위험한 순간에 꺽정이 단칼에 표범의 목덜미를 자르는 기지를 보인다. 그러나 운총이는 칼에 베이는 바람에 표범 가죽이 많이 상한 것을 두고 가장 여자답게 말한다. "저 털가죽은 좁쌀 한 말에도 못 바꾸겠다."고... 김훈 선생님은 이 대사를 가장 여성적인 특징을 드러낸 명문장이라며 웃으셨다. 기타 그 순간에 이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티없이 자라나는 도둑 청소년들의 밝은 모습'이라는 꽤나 우스꽝스럽다 못해 매력적인 표현을 쓰셨다.

2.꺽정이와 운총이의 사랑 (제2권 369~370쪽) : '맑은 눈 속에 박혀 있는 이쁘장스러운 눈동자에 천왕의 모양이 비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도 거룩한 눈동자는 온세상을 다 뒤져야 또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꺽정이는 생각하였다.'는 표현 뒤에 몇 마디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운총이 번쩍 들어 숲속으로 들어가는 꺽정이의 뒷모습은 상당히 매력저이다.


양반편

1. 흉년 묘사 (제3권 81~82쪽) : '사람은 고사하고 까막까치까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인분이나마 먹어보려고 뒷간에 와서 기웃거린즉 인분까지 없어서 뒷간이 비었다는 말이니 이 말이 거의 사실이나 다름 없었다.'는 표현을 읽노라면 가난한 백성들이 도적질이나 거지짓을 아니할 수 없는 불가피한 비참함이 묻어 난다.

2.세도가 윤원형에 대한 아첨 (제3권 168쪽) : '대체 말이나 개의 주인 위하는 충성은 일호 거짓이 없지마는 사람으로서 말 노릇 개 노릇 하는 것은 충성이 곧 거짓이라 말이나 개만 못한 거짓 충성이 주인의 눈 밖에 나서 좋지 못하게 신세를 마치는 것은 첩경 쉬운 일이다.'는 문장이 있다. 아첨도 진실성 있게 보여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여, 그 아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오히려 신세 망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임꺽정 시대에 백성들은 굶주리는 그 아픈 상황에서도 윤원형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표현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의형제편

1. 박유복이 아버지 원수를 갚고 어머니 무덤에 고하는 장면 (제4권 139~140쪽) :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 유복이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원수인 노첨지를 찾아가자, 노첨지는 유복이를 유복이 아버지로 착각하고, 혼비백산한다. 아버지를 닮았을 유복니가 그렇게 노첨지의 목을 자르는 장면은 일면 잔인하지만 그 시대의 정조 중에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표현이다. 노첨지의 목을 베어 가져가려는데 피가 넘쳐나서 부엌의 재로 지혈을 해보려지만 그 마저도 실패하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만큼 리얼하다.  유복이가 결국 그 목을 가져와서 어머니 무덤 앞에 통곡하는 장면은  '소나무를 흔들어 물 소리를 지어내던 새벽바람도 그치고 죽은 사람의 대가리를 보고 날아와서 근처 나무에 앉은 까마귀들도 짖지 아니하고 유복이의 울음소리만 온 산에 가득하였다.'는 표현으로 더욱 더 뭉클하게 다가 온다.

2. 임꺽정의 관상보는 장면 (제6권 249쪽) : "저렇게 극히 귀하구 극히 천한 상은 나는 처음 보우." 상쟁이가 꺽정를 보고 한 말이다.


화적편

1. 꺽정이의 성격 묘사 (제7권 29~30쪽) : '사람의 머리 베기를 무 밑동 도리듯 하면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차마 그대로 보지를 못하고 논밭에 선 곡식을 예사로 짓밟으면서 수채에 나가는 밥풀 한 낱을 아끼고 반죽이 눅을 때는 홍제원 인절미 같기도 하고 조급증이 날 때는 가랑잎에 불붙는 것 같기도 하였다.'는 표현은 임꺽정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의 성격을 가졌는지 알게 한다. 김훈 선생님은 이 문장을 읽으며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매우 발랄하게 작동하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평을 하셨다.

2, 청석골 졸개들 점고 장면 (제7권 379~380쪽) : 당시 생활 밀착형 이름을 통해 작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 김훈 선생님은 정조임금 시대의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빗대며 이 이름의 진실성을 역설하셨다. 이 점고 순간에 그 이름들은 허노미, 이노미, 개똥이, 작은쇠, 덜렁쇠,존이, 출이, 녹이, 복이, 동이, 삽살개미치, 자릅개동, 광노, 양필, 맹효, 강아지, 도야지, 부엌개, 마당개, 쥐불이, 말불이, 쇠미치, 말미치 등이 있다.

3. 단천령이 청석골 임꺽정패 앞에서 피리를 부는 장면 (제9권 124~125쪽) : '단천령이 우조를 다 불고 뒤를 돌아보다가 여러 사람 거동을 보고 적이 웃으면서 피리를 다시 불었다. 곡조가 달랐다. 이번 곡조는 처량하였다. 장구치던 기생이 계면조를 모를리 없건만 장구채를 꽂아놓고 가만히 앉았으므로 소홍이가 장구를 끌어다가 끼고 나서서 피리를 따라 장단을 쳤다.' 이 표현에서 김훈 선생님은 단순하게 넘어가지 않으셨다. 우조란 소리의 뼈를 가지런히 추리는 소리로 주어+동사의 느낌이자 글쓰기로 빗대자면 곧 김훈 선생님의 스타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소리의 살을 추리는 것이 계면조라 할 수 있는데, 문장에서는 형용사와 부사가 붙은 것으로 서편제와 같은 장르로 이해하기를 주문하셨다. 만약 심청전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의 입수가(계면조)를 우조로 부른다면 돈없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 심청이의 비장함이 느껴질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강연이 끝나고, 당신의 소설 '칼의 노래'에 나온 맨 처음 문장을 예로 들어 우조와 계면조의 글쓰기 특징을 말씀하신 장면을 마침 동영상으로 촬영하였기에 기록해 본다.

http://video.mgoon.com/1716586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우조: 사실을 냉혹하게 서술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계면조: 관찰자의 주관이 들어간 시선
버려진 섬마다 꽃(도) 피었다. 뽕짝의 느낌이 나는 트로트 같은 글...


많은 어른들이 말씀하시듯 김훈 선생님 또한 자모산성 이야기가 미완으로 끝난 것을 아쉬워 하셨다. 임꺽정과 더불어 실존 인물이었던 서림이가 역사적인 기록에는 조직을 배신하고 스스로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말씀 하시며 과연 홍명희 선생님은 자모산성편에서 서림이를 어떻게 그렸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며, 앞으로 당신의 글쓰기도 가능하다면 "앞으로 나는 벽초 홍명희 스타일의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고 말씀 하셨다.

임꺽정의 문장은 이야기를 나르고, 이야기는 문장을 끌고 가는 형식이다. 모든 문장들은 예외없이 이야기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장은 이야기를 떠받치고 이야기를 실어 나르지만, 그 문장은 이야기가 추구하려는 거대한 담론의 틀 안에서 매몰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신 김훈 선생님의 매우 겸손하게 자신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경지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 감동을 우리 평범한 독자들에게 함께 나누고 싶으셨던 것이고, 강연은 어느 정도 의도한대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충청도 노론 집안의 아들이 천한 이들의 삶을 어찌 그렇게 잘 알 수 있었는지 경의를 표하면서, 요새 젊은이들에게 쉽게 읽히기 힘들 수도 있는 문장일지도 모르지만, 태백산맥을 통해 전혀 모르던 전라도 사투리를 익히게 된 당신의 경험을 예로 요새의 젊은이들도 임꺽정을 읽다보면 익숙해질 것이며 아름다운 모국어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소설가로서 김훈 선생님은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홍명희의 임꺽정을 결코 손에서 떼놓을 수 없는 책이라 말씀하시며 강연을 마쳤다.

P.S.
강연 뒤에 이어진 질문은 김훈 선생님의 명성에 걸맞게 벽초와 임꺽정에 관한 질문 보다도 주로 김훈 선생님 작품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뤘다.

지난 강좌
1.고미숙과 임꺽정의 까르페디엠! http://blog.aladin.co.kr/corelk/2324811
2.이덕일과 벽초 홍명희, 임꺽정  http://blog.aladin.co.kr/corelk/231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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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 뒤편 저자의 글에 보면 그동안 난중일기 번역본이 완역이 아니었다고 지적한 것이 생각나는군요.이순신은 전쟁 중 첩을 불러들여 동침한 일까지 일기에 썼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