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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5
앙드레 브르통 지음, 오생근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앙드레 브르통은 너무나 많은 과제를 독자에게 준 것 같다.
결코 두껍지 않은데다 중간중간 그림(or 사진)도 많은 이 책을 읽는데, 꼼지락꼼지락 꽤나 시간을 투자한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투자했으면서도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건지 정의할 수 없어 다시 한 번 더 읽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수동적으로 읽는데 익숙한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 책의 실험적 서술방식이 많은 사색을 요구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루이 아라공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그가 장편 소설 '파리의 농부'를 집필하는데 핵심적인 영감을 제공한 파격적인 인물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나자'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나자는 소설이 꾸며낸 가상의 인물도 아니다. 수많은 실존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일상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이 작품 속에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작가가 우연히 만난 실존인물이다.
나자와 함께 등장한 아라공은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던 그의 명언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그저 읽는데서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를 찾으려 노력 했다. 공교롭게도 나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나는 또 다른 희망을 읽었다.
"나자예요, 왜냐하면 나자는 러시아어로 '희망'이라는 말의 어원이기 때문이고, 또 단지 어원일 뿐이기 때문이죠." (68쪽)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파리 시민들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브르통에게도 나자는 바로 희망의 빛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1926년 10월4일은 농담처럼 우리들이 말하는 천사(1004)의 날이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나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나는 방황하는 영혼이에요."라고 답한다. 이후로 몇 달간 지속되는 작가와 나자와의 만남은 초현실주의라는 주제 하에 평범한 독자들에게 큰 짐이 되는 이 소설을 남긴 것이다. ^^;
나자에 푹 빠져버린 작가는 나자를 만나는 우연과 몽환적인 순간들을 서술한다. 어쩌면 브르통의 동료인 당시의 초현실주의자들만이 공감하는 글이 아닌 현실에서 나자에 대한 별도의 가치는 분명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그것이 평범한 독자로서 내가 이 글을 읽는데에 대한 불편함의 핵심이라고 고민해 본다.
그녀에게 구원이 되었다는 '절친한 친구'라 불리는 남자와 스핑크스 호텔의 사연, 도중에 나자에게 반한 웨이터의 행동에 관한 서술이나 기차에서 창밖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 구걸하는 줄 알았는데 연필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는 노파의 모습 등 시시콜콜한 모습에서도 나자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는 브르통은 확실하게 나자에 빠져버린 현대의 언어로 나사 빠진 사람 같았다. 그는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도움을 주려하지만 나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상관 없는 이야기만 해댄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지루해 지는 것은 브르통이고 그는 그녀와의 어울림에 어려움을 느낄 뿐이다. 나자의 망설이지 않는 언어들은 작가에게 큰 울림이 되어 기억을 맴돈다.
"내 숨결이 끝나는 것과 함께 시작하는 당신의 숨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 당신한테 난 아무것도 아니거나, 하나의 흔적일 뿐이겠지요."
"사자의 발톱이 포도나무의 가슴을 조른다."
"검정색 보다는 장밋빛이 더 좋긴 하지만, 어쨌거나 검정색과 장밋빛은 잘 어울리는 색이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야. 나는 당신의 입술 끝에 붙어서 숨 쉬거나 죽어가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지. 나는 눈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평온한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데."
"왜 조개탄이 가득 찬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저울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 구두의 무게로 생각을 무겁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흘린 눈물의 물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애를 쓴 것이다."
"시간은 여유가 없게 굴어. 시간은 여유가 없다니까. 왜냐하면 모든 일이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야만 하니까."
나자는 브르통에게 '연인의 꽃'이라는 그림을 그려 준다.
이 책에는 나자와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브르통이 직접 찍은 사진이나 그의 동료들인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렇게 나자가 직접 그린 그림 수십 개가 수록되어 있다. 글도 난해한 만큼 그림에까지 설명을 붙여줄 친절함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그러한 불친절함이 이 책의 불편한 진실이다.
더이상 수동적이지 않은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책을 함께 해석해 줘야 하는 것이 작가의 바람인 것이다.
그 순간, 이 책의 마무리 단계에 인용된 헤겔의 논리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누구나 자기의 현재 세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은 이 세계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표현할 뿐이다." (163쪽)
무의식을 향한 작가의 정열과 나자에 대한 그리움들, 독백들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