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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군대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8
노먼 메일러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적과 아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현대 전쟁을 암시하는 제목 '밤의 군대들'은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의 도버 해협(Dover Beach)이라는 詩를 생각나게 한다.
And we are here as on a darkling plain
Swept with confused alarms of struggle and flight,
Where ignorant armies clash by night.
그리고 우리는 여기 어두운 광야에 있네.
발버둥치며 도주하는 혼란스러운 외침에 휩쓸리며
무지한 밤의 군대들이 서로 충돌하는 곳에.
이 것은 같은 시(詩)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번역과 달리 옮긴이만의 개성이 느껴지는 그 성향을 알 수 있는 번역이다.
한 번의 번역 과정을 통해 독자가 이해해야 하는 노먼 메일러의 문학 작품이 얼마나 감동을 줄까?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기에 오르가슴(orgasm)과 워가슴(wargasm)을 오가는 작가의 언어 유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처음에는 이 소설에 적응하기가 힘이 들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롭게 읽혀왔다.
더구나 이 소설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실제 상황(fact)과 작가의 상상력(fiction)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작품으로 팩션(factio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작품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자유화의 물결이 거셌던 시기였다. 그 때 베트남 전쟁이 터졌으며 표면적으로는 반전 시위였을지언정 실상 그 내면에는 미국 내 사회적 갈등과 세계적 공감이 함께 했던 것이다.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가?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란 무엇일까?
이 때 적절한 표현으로 레닌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처럼 흘러가는 십 년도 있지만, 십 년과 같은 혁명적인 하루도 있다."
소설로서의 역사 vs 역사로서의 소설
1967년10월19일 목요일, 소설가 노먼 메일러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한다. 엠버서더 극장에서 진보주의자들의 파티에 참석하게 된 메일러는 아직까지 정치적으로 냉소적이며 외설을 사랑하고 허영심도 많은 인물이다. 하지만 점점 변해가는 메일러, 메일러는 법무부에 징집 영장을 반납하는 대학생들을 이해하게 되고 옹호하며 시위에 동참한다. 1967년10월21일 토요일, 미국 국방성 펜타곤 앞에 수많은 시위대들이 체포 당한다. 유대인 메일러는 고독한 실존주의자로서 파시즘을 경멸하고, 호송차로 끌려가면서 나치와의 대결로 두려움을 극복한다. 감방에서 밤을 새우며 메일러는 펜카곤의 시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정리한다.
중국 공산당 세력이 점점 팽창하며 소련과 적대 관계를 급속히 키워 나가자, 와스프 기사들의 해묵은 맹세는 점점 복잡해지고 추상적으로 됐다. 만약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곧 동남아시아, 호주, 일본, 인도 등이 중국 공산당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아시아(그리고 아프리카?)가 단합해서 미국(그리고 소련?)에 대항하여 핵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 매파를 변론하는 친구들은 중얼댄다. 아마 베트남전은 미국이 참여한 전쟁 중 가장 불행한 전쟁일지 모른다. 하지만 꼭 필요한 전쟁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적어도 중국과 핵전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베트남 전쟁이 낫지 않겠느냐고...
반면에 비둘기파를 대변하는 친구들은 미국의 국경과 너무도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미국의 간섭으로 베트남은 오히려 중국과 더 가까워진 것에 주목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미국 내에 끼친 심각한 피해를 보라고 말한다. 시민권은 도시 폭동으로 타락했고, 유능하고 촉망받는 미국 학생들은 허무주의와 마약의 전선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말이다.
매파는 잘난 체하며 자기들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비둘기파는 정말 파고들어야 할 문제를 회피한다.
메일러는 통계적 수치를 떠올린다. 베트콩이 군인 한 명을 베트남에 보낼 때 물자가 1Kg이라면 미국은 1,000Kg을 쓰고 있다. 폭탄으로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죽이고 다치게 한다면 그 전쟁은 나쁘다. 인구를 재배치하는 전쟁은 나쁘다. 전선도 없고 뚜렷한 절정도 없는 전쟁은 나쁘다. 과열된 우월감과 과열된 논쟁 속에서 나라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전쟁은 나쁘다. 애국심을 지속할 의미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전쟁은 나쁘다. 그 뿌리가 너무 복잡하고 타협적이어서 그 자체를 전쟁으로서 개선할 전망이 없는 싸움은 나쁘다. 베트남 전쟁은 나빠도 보통 나쁜 전쟁이 아니다. (284쪽)
메일러는 아시아는 아시아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손을 뗄 것 같지는 않다.
감방에서 메일러는 몇몇 사람들과 대면하고 토론한다. 흑인 민권운동의 기수였던 짐 펙, MIT의 천재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건축가이며 운동장 설계자인 로버트 니콜스, 초기 사이키델릭 잡지의 편집자 툴리 쿠퍼버그, 혁명가들을 위한 오코콴 무료학교 초대 교장으로 불리던 티그 등...
법정에서 50달러의 벌금과 삼십 일간의 복역 선고에 집행유예 이십오 일의 판결을 받은 메일러, 스케이프 위원에 맞선 변호사 허치컵, 완고한 소비자와 대담하고 거칠게 성공을 거두는 세일즈맨의 열전을 보는 듯한 법적인 공방도 재미있다. 연고 문제로 직접 나설 수 없었던 드 그라지아의 뒤를 이은 유대인 변호사 허치컵은 결국 스케이프 위원을 설득하여 보석으로 풀려나게 하는데 성공하고, 보석금 500달러를 통보 받고도 청원과 청원의 설득을 통해 서약으로 풀려나게 하는 유능함을 보인다. (323쪽)
신문과 기자의 돌발적인 상황에도 익숙하지 않았던 메일러는 펜타곤에서 보낸 나흘 동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제1부 '소설로서의 역사'이며, 이제부터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제2부 '역사로서의 소설'이다.
논쟁적이지 않으면 쓰지 않겠다는 노먼 메일러는 '밤의 군대들'에서 자기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현실의 참모습을 가리는 대중매체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듬해에 출간되어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였다.
다소 매끄럽지 못한 번역과 몇몇 눈에 띄는 오자들 때문에 난감했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을만 했던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