넙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3
귄터 그라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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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은 이 소설의 작가 귄터그라스가 그렸다. 그림도 참 잘 그린다.
제1권의 표지는 인어를 만드는 작업처럼 넙치 한 마리가 성숙한 여자와 하나가 되는 민망한 모습이다. 제2권의 표지는 어떤 남자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넙치의 모습을 그렸다. 이 두 가지의 표지 그림은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한 상징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횟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메뉴가 광어회다. 광어(廣魚)는 넙적한 물고기란 의미로 넙치의 한자식 이름이다. 광어회는 비대칭적으로 머리의 왼쪽에 두 눈이 쏠려 있는 그냥 군침도는 횟감이다. 바로 그 넙치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귄터그라스는 이 소설에서 넙치를 말 하는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황당한 설정이 아닐 수 없지만 대화의 농도와 깊이 때문에 수준 높은 풍자 소설이 되어버렸다. 대화의 소재 자체가 인류 역사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대립과 반목을 이야기 한다.

이 소설은 산만하다. 읽다보면 탈선(?)할 수도 있을만큼 수 많은 시와 서사적 연대기, 개별적 에피소드, 다양한 요리법으로 짬뽕되는 등 다층적인 전개 방식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을 오가면 짬짬히 읽는 나같은 독자는 이야기의 구심점을 놓쳐버리기 쉽다. 앞뒤를 오가며 읽고 또 비교하다 보면 그제서야 상호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을 만큼 유기적인 관계를 발견하는데,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 그 모든 것을 분석해 가면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 천년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 회고하는 일인칭 서술방식이 기본 뼈대를 이루지만 체험자가 되기도 하고 관찰자가 되기도 하고, 역사상 다양한 인물로 변형하여 등장하는 등 주인공처럼 장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는 그 어떤 문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서술 기법을 보여준 이 소설은 거의 모든 표현 가능성에 도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석기시대가 끝나갈 무렵, 남자들이 아우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도 힘들고 기발한 생각도 하기 드물었던 시절, 바로 모계중심의 사회가 당연시 되던 그 시절에 나는 우연히 바구니 어살속에 걸려든 넙치를 만난다. 어부인 나는 전지한 듯한 말하는 넙치에 반해 넙치의 요구대로 넙치를 살려주었고, 세로운 세상에 눈 뜨기 시작했다. 나를 보호해주고 있던 아우아는 유방이 셋 달린 자신의 그림은 허용하면서도, 뱀장어 어살 속에 잡힌 넙치의 그림은 그리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 아우아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넙치를 몰래 그렸고, 필요할 때마다 넙치를 불러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 여자는 자기 존재를 언제나 자기 존재만을 확인하려고 해. 그 여자의 손길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금기로 되어 있어. 하지만, 젊은 친구야, 예술이란 금지 시킬 수 있는게 아냐."  그렇게 우유부단한 남성들에게 바람을 집어 넣어 남성 중심의 세계로 가는 길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는 넙치...

"아우아는 우리가 궁금해 하거나 미심쩍어 하면 금방 젖을 물려 줍니다. 그러면 불안감과 궁금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곤 합니다. 반면에 넙치님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요." 아우아에게 지배받는 남자들의 습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넙치의 선동(?0으로 서서히 부계사회가 정착되고, 결국 완전한 부계사회로 전환되었지만 끝없는 전쟁과 혼란은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

이에 책임을 느낀 넙치는 남성대신 여성들의 낚시대에 걸려 반대되는 입장의 조언자가 되어 모계중심 사회로 되돌리려 하지만 오히려 여성들은 넙치를 법정에 세우고 형벌을 내린다. 여성들에 의해 함석욕조에 갇혀 재판을 받게 된 피고(넙치)가 발언한다.
"내 충고 덕분에 압박에서 허덕이던 남자들이 수천년에 걸친 선사시대의 여자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을 시인합니다. 그들은 자연의 제약에 저항하고, 질서의 원칙을 만들었으며 근친상간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모계사회를 책임있는 규율이 지배하는 부계 사회로 대체하였고 ...(중략)... 그런데, 그들은 지나치게 지배만을 강조했습니다 ...(중략)... 근본적으로 나는 남녀 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심리결과는 넙치의 유죄!

나이를 알 수 없지만 적얻 수천살 먹은 주인공인 내가 임신한 아내 일제빌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고향 강어귀의 늪지대를 배경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중세, 바로크 시대, 절대 왕정기, 혁명의 근대사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대 순으로 펼쳐진다.
그녀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유방이 셋 달리 첫번째 요리사 아우아, 젖을 탄 물고기 스프를 먹여주던  두번째 요리사 비가. 사제로 아우아를 숭배했던 세번째 요리사 메스트비나, 주인공 파멸의 원인이 된 네번째 요리사 도로테아, 뚱보에 웃음이 헤펐던 다섯번째 요리사 그레트, 착한 여자였던 여섯번째 요리사 아그네스, 감자를 닮은 여인이던 일곱번째 요리사 아만다 보이케, 혁명의 여인으로 평생 수절했던 여덟번째 요리사 조피 로트촐, 출판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식 요리책을 집필했던 아홉번째 요리사 레나 슈트베가... 열번째와 열한번째 요리사는 아직 그 모습이 뚜렷하지 않은데 그 이유가 그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빌리와 지금 나의 요리사 일제빌...

이 책은 여러 요리사를 통한 요리와 식사의 모습으로 식량과 음식의 역사, 배고픔의 역사를 다룬 인류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문화사이며, 수천년 화합의 역사이자 갈등의 역사를 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사를 다루고 있다. 그 난해한 문제를 굳이 정답이 없더라도 넙치를 매개로 우화적으로 다룬다는 시도는 대단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귄터그라스의 자화상으로 아우아의 세번째 젖을 빨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이 책의 평론가들에 의해 아우아의 젖이 세 개인 이유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기 쉬운 상황을 부드럽게 바꿔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균형의 젖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단지 젖이 아니라도 그 숫자 3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972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자기자신을 50번째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시도한 이 작품은 도입부에 '헬레네 그라스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헬레네는 이 작품을 한창 집필중이던 1974년 여름에 태어난 딸이다. 어떨결에 이 작품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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