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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누군가 '그 책 어때?'라고 묻는다면... 말 없이 주먹을 내밀고, 입꼬리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쓰윽~ 올려 줄 것 같다.
일세기 전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이야기이건만... 전체 문장을 그대로 패러디 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공의 접목이 가능한 명문장들이 아닐 수 없다.
소재는 비장하다. 그러나, 애처러움마저도 여유로운 폭소로 읽혀진다.
표현은 음란하다. 그러나, 옆 사람과 허물 없이 읽을 수 있을 만큼 유쾌하다.
문체는 산만하다. 그러나,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재치있는 수다스러움일 뿐이다.
역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 표정만큼이나 익살스러운 글로 강한 울림까지 전달하는 작가였다.
최근에 읽은 마르케스의 작품으로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있는데, 그 책에서 느낀 실망을 충분히 극복하게 해준 책이다. 보다 젊었을 때 쓴 책이라서 그런 것일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가 주인공인 탓인지 자연스럽게 묘사되는 있는자의 횡포가 느껴지기도 한다. 철저하게 남들의 사랑을 짓밟고, 자신의 사랑을 쟁취해 가는 과정의 묘사를 보면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부적절한 사건들 중에서 특히 대표적인 것이 아리사와 바람 피우다 남편에게 들켜서 살해된 술레타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루이 게라의 '비둘기를 키우는 아름다운 여인의 우화'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는데, 마르케스적인 문학으로는 뛰어난 글솜씨에 빛나는 이야기이겠으나 내용적으로 부도덕함과 비극의 필연적 앙상블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한 방화중에 하나인 '죽어도 좋아'는 화제가 만발했던 노인들의 사랑이야기인데 이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 중에 하나인 '공원에서 온 편지'에서는 이 소설 4장 초반부에 언급된 연애편지 대필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 중에 하나인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서는 각자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해버린 남녀의 만남이 소재이다.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제안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던 그녀는 남자의 전화번호가 적힌 5달러 지폐로 신문을 사버리며 또한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책을 헌책방에 팔아 버린다. 이때 그녀가 헌책방에 맡긴 책의 제목은 바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Love in the Time of Cholera)이다. 중고책에 맡겨진 그들의 운명이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이듯 이 책의 소재 또한 운명적인 사랑에 있다.
이렇게 멋진 영화들과 함께 했고,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독서였기에 나름대로의 내용 정리를 해 본다. 다음과 같이...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는 카리브해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살아가는 의사이다.
박사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죽음 뒤, 유서에 따라 망자의 숨겨진 여인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지역의 유명한 아동 사진사이자 자신의 체스 맞수로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밀했던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에게 숨겨진 여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움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 연인은 아직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도도한 물라토(흑백혼혈) 여인이었는데, 그들이 남몰래 함께했던 사랑의 시간이 무려 20년이 넘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며 보다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오래전 어느 바닷가에서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거야."라는 망자의 말을 추억하던 그녀는 늙어감에 맞서려는 영웅적인 의도로 그 말의 의미를 해석했었으나, 그 참된 의미는 늙고 초라해질무렵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꽤나 진지한 결정이었음을 최근에야 알게 된다. 그녀는 결국 성령강림대축일 전날밤을 기해 자살을 기도한 늙은 애인과 마지막 시간을 사랑으로 함께 보냈으며, 미리 자살 계획을 알았으면서도 말리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를 나무라는 우르비노 박사에게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를 너무나 사랑했으니까요."
얼마 전 금혼식을 치른 우르비노 박사는 아내와 함께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을만큼 상호 의존하며 지낸다.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삶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편의상 그런 것인지는 잘 정리되지는 않는다.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반 세기를 살아온 노부부의 행동은 마르케스의 재치있는 글맛으로 마냥 즐거울 뿐 그들의 삶에서 사랑의 불꽃이나 또 다른 긴장감은 느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나는 물라토 여인과 자살한 생타무르의 지난 20년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며 망자의 벗이던 우르비노 박사는 관찰자로서 이 이야기에 충실하게 개입할 것이라 지레 짐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니 유감이군요."
파티에서 올리베야 박사는 생타무르의 죽음을 이렇게 평하고, 우르비노 박사는 자신의 수제자의 입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 한 마디로 진정한 주인공에 대한 혼란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르비노 박사는 궁금증이 더 커지기도 전에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를 잡으려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추락사한다.
이렇게 주인공으로 추정되던 두 노인이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등지게 되는 순간부터 나의 새로운 몰입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중심인물은 누굴까?
우르비노 박사의 장례식 때는 비가 많이 내렸다.
조문객 틈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친절하고 진지한 일흔 여섯의 노인으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자신감과 기품이 넘쳐 흘렀다.
그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머무른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모든 예식이 끝나갈 무렵 미망인 앞에 다가온 그가 고백을 한다.
"페르미나, 반세기가 넘게 이런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소...(중략)... 당신은 영원한 나의 사랑이라는 맹세를 다시 한 번 말하기 위해서 말이오."
그는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페르미나의 첫사랑 플로렌티노 아리사였다.
물론, 페르미나의 저주와 증오는 입을 다물지 못할 수준이다.
이 황당한 사건이 있기 오래 전...
콜레라가 카리브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한 사나이 '로렌소 다사'가 외동딸과 노처녀인 여동생을 데리고 이사를 왔었다.
당시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말수도 줄고 식욕도 잃어버렸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까지 했다. 소녀에게 첫 편지를 보낸 청년은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설사를 했으며 푸른색의 물을 토하는 데다... 방향 감각을 잃고 갑자기 기절하는 일도 있었다. 맥박은 희미했고 호흡은 거칠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식은 땀이 흘렀었다. 그렇게 상사병은 콜레라와 동일한 증상으로 다가왔다.
청년의 사랑은 잘 익어가는 듯 싶다가 대부분의 사랑이 그러하듯 주위 환경에 의해 어긋나게 되는데, 그녀가 열여덟의 나이에 잘 나가는 의사(후베날 우르비노)와 결혼을 하면서 잊혀지는 존재가 되지만 청년은 괴로움 속에서도 수많은 여자들과 세속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언젠가 다시 그녀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갈 결심을 한다. 상대가 너무도 잘 나가는 의사인 탓에 그 또한 그녀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돈과 명예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줄거리만 얼핏 보면 위대한 개츠비의 비장함이 묻어 날 것도 같지만 재치와 익살의 작가 마르케스는 슬픔도 미소와 함께 전해주며, 고통도 포복절도와 함께 읽도록 배려하고, 음란함도 넘치는 익살로 묘사했다.
"우리 아들이 앓는 병이라고는 콜레라 하나 밖에 없어"
창문의 거리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며 사생아인 아들을 키웠던 트란시토 아리사는 죽기 전까지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콜레라와 상사병을 혼돈한 착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섯번이나 임질에 걸리는 등 온갖 잡병에 시달려온 아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발언이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제목에나 어울릴 법한 망언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 레온 12세는 아흔 두살이 되자 조카에게 '카리브 하천회사'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조합원들의 만장일치로 이사회 회장겸 사장으로 임명되던 날 밤, 레오나 카시아니가 열어준 파티에서 그는 한 여인을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로 그 자리를 대신했던 수 많은 여인들을 추억한다.
성(姓)을 알 수 없는 여인 '로살바'는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그의 동정을 빼앗아 버렸었다. 어머니가 은근히 엮어준 나사렛의 과부는 죽은 남편을 위해 수절을 하다가도 순식간에 그를 덮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성(性)에 눈을 떠버렸고, 자유부인(?)으로 30여년을 살아가는 동안 간헐적으로 만나는 관계로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장례식까지 책임졌던 유일한 여자였다. 프루덴시아 피트레는 두 번이나 과부가 되는 바람에 '두 남자의 과부'로 불리우던 관계의 여인이었다. 아레야노의 과부였던 또 다른 프루덴시아는 그의 옷에 달린 단추를 잡아 뜯곤 그 단추를 다시 달아줄 동안 못나가게 잡아놓던 사랑스러운 과부였다.수니가의 과부 호세파는 독점의 욕망 때문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물건을 전지가위로 잘라버리려고 했던 위험한 여자였다. 앙헬레스 알파로는 음악학교에 현악기를 가르치러 왔다가 달밤의 옥상에서 첼로의 모음곡들을 태아적 누드로 수놓다가 떠나버린 여인이었다. 난잡한 사랑의 여인 안드레아 바론은 기둥서방도 없이 자기몸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여자였으며 플로렌티토 아리사의 변비 치료용 관장제에서 관능을 찾은 달콤한 고급 창녀였다. 정신병원을 탈출해 축제에서 만난 '사라 노리에가'는 고통의 물방울을 맛보게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비둘기의 여인 올림피아 술레타는 남편에게 부정이 발각되어 살해되었으며...
사장이 된 후에 페르미나 다사를 대체할 수 있는 여자는 '아메리카 비쿠냐'라는 겨우 열 네살의 친척 소녀였다. 이 나이 어린 소녀는 그동안 다른 여자들이 해내지 못한 불타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페르미나 다사를 대신 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주인공이 그 소녀 그대로를 사랑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진실로 사랑에 빠졌지만 소녀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이면 자신은 늙어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성령강림대축일, 곧 기숙사로 돌아가야할 소녀와의 불타는 사랑을 마쳤을 때 끈질기게 울려대는 교회의 조종 소리...
그 종소리는 바로 그의 첫사랑이자 평생의 여인이던 페르미나 다사의 남편이 죽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남의 슬픔이 그에게는 기쁨과 승리의 종소리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첫번째 책의 100페이지쯤에서 비롯된 과거 회상 장면이다.
이제 내용은 다시 장례식 이후에 펼쳐지는 과부 페르미나 다사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새로운 사랑이야기이다.
열세살의 소녀 '페르미나 다사'를 처음 본 날이 우르비노 박사의 장례식이 있기 51년 9개월 하고도 4일 전 일이었다.
남편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와 구애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하고 짜증스러운 일인가?
처음 그의 편지를 받아 읽은 그녀는 울화가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온갖 욕설로 답장을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그의 일방적인 편지는 변함 없이 지속된다. 단순하게 그 편지가 이기적인 구애가 아니라 과거를 지우려는 아주 고귀한 방식이라 인식하게 되자 짜증스럽기만 했던 편지는 과부 할머니의 무료한 생활에 뜻하지 않은 활력을 불어 넣어주게 된다.
어느날 오후, 용기를 내어 그녀를 찾아가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뜻밖의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평생을 변비로 살아온 이 노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복통과 설사는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결국 이틀후에 다시 약속을 잡고 찾아오게 되며, 이후로 일흔 두살 과부와 일흔 여섯살 순애보 총각(?)의 만남은 건전한 일상이 된다. 그녀의 아들 우르비노 다사 박사는 "노인은 노인들 사이에 있으면 덜 늙게 마련이죠."하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좋게 해석하게 되고, 이들의 만남은 가족적인 것으로 정착되어 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질투의 신은 그 두 노인의 관계가 발전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았다. 어느날,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러 자리에 드러눕게 된 플로렌티노 노인의 마음은 참으로 비참해 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자리에 드러누워 편지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창간된지 얼마되지 않은 신문 <정의>에 죽은 남편과 친구 루크레시아 델 레알 델 오비스포'의 확인되지 않은 스캔들 기사가 실리고, 그녀의 불명예 스러운 아버지 '로렌소 다사'의 부도덕한 사업을 까발리는 기사들이 실리면서 늙은 과부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평생을 연애 편지로 다져온 실력을 발휘하여 그녀를 옹호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유서깊은 <상업신문>에 '유피테르'라는 필명으로 그러한 글을 쓰게 되고, 그것은 그녀를 크게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나이에 사랑이란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들 나이에 사랑이란 더러운 것이예요."
거듭된 스캔들로 기운을 잃었다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위로로 기운을 차려가던 어느날, 적어도 순수한 우정으로 지내던 두 노인의 관계를 생각할 때, 뉴올리언스에서 찾아온 딸 오펠리아의 방문과 발언은 큰 상처가 된다. 이 일로 오펠리아는 친정에서 쫓겨나게 되고, 늙은 과부는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는 늙은 남자친구에게 말한다.
"이 집을 떠나고 싶어요. 더 이상 이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그럼 배를 타고 떠나도록 해요."
카리브 하천회사의 주인답게 늙은 남자친구는 멋진 제안을 한다.
이렇게 떠난 선박 여행에서 늙은 연인들은 사랑을 나누게 되고,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 늦은 의구심에 압도된 선장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두 늙은 연인의 데이트용 선박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배 안에서 마지막 용기를 내어 묻는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이어지는 대답이자 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늙은 총각의 한 마디...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번역을 맡은 송병선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작년 봄에 읽은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형편 없었는데, 번역 탓이 아닐까 하고 오해했었으나 적어도 번역 탓은 아닌 듯한 인상이 들었다. 그것만큼은 마르케스가 너무 재미 없게 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