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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평점 :
책을 처음 읽다보니 '파브리스 델 동고'의 정열과 욕망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스탕달 노년기의 작품 '파르마의 수도원'에서 야심 많고 대담하고 도덕감이 결여된 주인공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청년 쥘리엥을 발견한 것이다. '적과 흑'은 스탕달 인생의 절정기인 1830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당시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로 왕정복고의 시대였는데, 중죄 재판소의 어느 평범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역사 철학과 심리 연구를 통해 대혁명이 형성해 놓은 사회의 분위기를 스탕달 특유의 글발로 풍자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절정의 순간을 그냥 스쳐가 버린 듯한 허무함...
내가 빼먹고 읽었나 싶어 다시 읽고 또 읽어보지만 그저 생략일 뿐, 그것이 스탕달의 매력적인 글맛인 듯 싶다.
매 장이 시작될 때마다 인용한 여러가지 문학적인 암시들이 멋졌던 이 작품의 기억을 위한 정리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베리에르, 제재소집 아들 쥘리엥 소렐은 아버지와 형에게 학대받으며 자라다가 셸랑 신부의 추천으로 그는 지역 유지이자 지독한 왕당파인 '드 레날' 시장 집의 가정교사가 된다. 시장에게는 신앙심이 두텁고 정숙한 부인이 있었는데, 쥘리엥은 나폴레옹의 조력자였던 여인들을 꿈꾸며 아름다운 그녀를 유혹하게 된다. 신분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이 동경하던 나폴레옹을 모델로 야망을 불태우는 청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지만 그들의 스캔들은 질투심 강한 하녀 엘리자에 의해 시내에 쫘악 퍼져서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그는 다시 노신부 셸랑의 추천을 받아 브장송 신학교의 교장 피라르 사제를 찾아 도피(?)를 한다. 그 시대에는 붉은 제복의 장교가 되는 것이 출세의 상징이었는데, 귀족 자제들이 독식하는 그 자리를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쥘리엥은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검은 옷을 입는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이다. 한 편으로는 군인보다는 성직자의 힘이 강해지던 시절이기도 한데 나폴레옹을 동경한 탓인지 우리의 주인공은 스스로 선택한 사제의 길에 염증을 느낀다. 하지만 피라르 사제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추천으로 파리의 대귀족 '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되기에 이른다.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은 파리로 가는 도중에 베리에르의 드 레날 부인을 몰래 찾아 들어가 뜨거운 밤을 보낸다.
드 레날 부인을 뒤로하고, 드 라 몰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스캔들은 이 작품 2부를 주로 장식하는데, 우리의 주인공은 사랑보다는 콧대 높은 그녀를 귀족 계급에 대한 증오심과 사랑의 교차를 통해 혼란스럽게 관계하다가 결국 그녀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마틸드의 임신과 결혼 동의는 쥘리엥의 야망이 정점에 이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만 본의 아니게 드 레날 부인의 편지로 인해 그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된다. 신분상승의 꿈이 좌절된 쥘리엥은 격분하여 이성을 잃고, 드 레날 부인을 찾아가 미사중인 그녀를 권총으로 저격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부인은 죽지 않고, 쥘리엥은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 사건으로 삶과 목표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간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던 그 순간까지 드 레날 부인과 쥘리엥의 사랑, 버림 받았으나 헌신적이었던 마틸드의 이야기는 마냥 슬프지 않고, 유쾌함으로 읽혀졌다.
작품 중 인텔리겐티 파우카(Intelligenti pauca)라는 라틴어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 말 뜻(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긴말이 필요 없다.)과 달리 이 소설은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장황함 속에 드러나는 재치있는 문장들이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