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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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길에서

    - 크눌프를 생각하며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우리는 창백한 들판 위에
차가운 달이 남몰래 웃는 것을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잡고 쉬게 되겠지.

슬퍼하지 마라. 곧 때가 오고,
때가 오면 쉴테니. 우리의 작은 십자가 두 개
환한 길가에 서 있을지니
바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오고 가겠지.

        - 헤르만 헤세


최근에 읽은 헤세의 책들은 늘 졸립게 만드는 수면제 같은 것들 뿐이었다.
슬슬 헤세가 싫어지려고 할 때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손에 잡은 것이 바로 이 책 '크눌프'였다.
다행스럽게도 크눌프는 즐거운 독서 시간을 제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즐거운 헤세 읽기였던 것이다.
크눌프는 평범하고 안정된 보통의 생활들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떠돌면서 이곳저곳에 수 많은 친구들을 심어 놓은 참으로 행복한 방랑자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즐긴다.
게다가 번역을 잘한건지 부드럽고 술술 읽히는 글맛 때문에 이번 독서가 행복했다.


"나는 전지전능한 자세로 삶과 인간성에 대한 규범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를 사로잡는 것을 묘사할 따름입니다.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 헤르만 헤세,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세가 '크눌프'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시민의 직업윤리와 기준으로 볼 때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좀 더 넓은 시야로, 신의 시선으로 볼 때 크눌프와 같은 삶 또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노은, 작품 해설 중에서


1915년에 발표된 3개의 단편(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으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소설이다.
모든 헤세문학에서 일관성 있게 만날 수 있는 방랑벽과 회향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젊음이 결코 충동적인 낭만만이 아님을 젊은 독자들에게 일깨워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주인공 크눌프는 방랑자이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하며 사회질서에 편입하지 못한 무능력자이다.
어린애 같은 마음을 지닌 꿈꾸는 자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희와 만족을 주는 유쾌한 성격을 지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향을 상실한 고독한 인간으로서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인생의 낙오자이기도 하다.

실연의 상처를 입고 인생의 방관자가 되어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며 젊음을 낭비한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에게는 노래를 들려주고, 어른들에게는 유쾌한 이야기를 해주어 그들을 즐겁게 한다.
비록 바보 취급을 받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그러다가 폐병을 앓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킨다.

구속없는 자유와 자연을 사랑하는 크눌프는 병원을 뛰쳐나와 눈덮인 고향의 산길을 헤매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지친 몸을 가누며 자신이 진정 삶을 잘못 살았다고 신에게 절규한다.
"나는 네가 지금 처한 상태를 그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너는 내 이름으로 방황하면서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금이나마 새로운 자유를 갈망케하는 향수를 불어넣어 주었다. 내 이름으로 너는 바보짓을 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조소하게 했다. 너를 통해 나는 조소당했고, 너를 통해 나는 또한 사랑받았다. 너는 내 친구이며 내 몸의 일부이다."
크눌프는 이와 같은 신의 음성을 듣고 방황의 삶과 화해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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