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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평점 :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이 멋진 희곡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의 뒤를 잇는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 작가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게 두 작품에는 비슷한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뉴 올리언스의 '극락'이라는 거리가 있다.
그곳 거리로 동생을 찾아 오는 블랑시가 타고 온 전차의 이름은 '욕망'이다.
이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 12쪽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언니 블랑시 두보아, 우아한 세계를 떠나 육욕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동생 스텔라 두보아, 스텔라를 몸으로 사로잡은 스탠리 코왈스키는 블랑시와 아주 상반되는 의미의 존재다.
스탠리의 친구 미치와 사랑에 빠지고, 다시 그 사랑이 끝나갈 때 토해내는 블랑시의 고백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다 알게 된거죠. 있을 수 있는 최악의 방법으로 말이에요. 비어 있다고 생각한 방에 갑자기 들어 갔는데 빈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있었어요. 내가 결혼한 소년과 몇 년간 그의 친구였던 나이 든 남자가... (기관차 지나가는 소리와 기관차의 헤드라이트) 그 후 우리는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척 했어요. 그래요. 우리 셋은 문 레이크 카지노로 차를 몰고 갔어요. 술이 잔뜩 취해서 가는 내내 웃어 댔지요. (희미하게 들려오는 폴카 음악) 우리는 바수비아나에 맞춰 춤을 추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나와 결혼했던 소년이 내게서 벗어나 바깥으로 달려 나갔어요. 몇 분 후에는 총 소리가!!' (폴카 음악이 멈춘다.) - 102쪽
'그래요 나는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어요. 앨런이 죽고 난 뒤......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만이 내 텅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보호 받으려 했던 것은 공포, 공포 때문이었죠. 여기 저기, 생각해서도 안될 곳까지, 마침내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까지도, 하지만 누군가가 교장에게 편지를 썼죠...... " 저 여자는 교사직에 적합하지 않아!"라고.' (흐느끼듯이 발작적으로 웃던 블랑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헐떡거리다 술을 마신다.) 맞느냐구요? 그래요, 내 생각에도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어쨌거나...... 그래서 여기에 온 거예요. 다른 곳이 없더라구요. 나는 진이 다 빠져 버렸어요. 진이 다 빠져 버렸다는 말 알아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죠! 하지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군요! 키파버와 스탠리와 쇼가 연꼬리에 낡은 깡통을 매달아 시끄럽게 만들었네요.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지 말아요. 속으로는 절대 안했어요. 마음 속으로는 거짓말한 적 없어요. -134쪽
정숙하지 못한 과거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의 말처럼 마음 속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애처러울 뿐 천박하지는 않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미치는 나의 예상과 달리 사랑의 마음 없이 블랑시의 육체만을 탐하다가 완강한 거부에 그냥 물러가는 현대사회의 소시민적 존재일 뿐이다. 출산을 앞 둔 스텔라를 병원에 두고 블랑시에게 다가온 스탠리는 결국 이 슬픈 여인의 처절한 저항을 아랑곳 않고 강간 한다. 모든 진실은 몽환적인 단어들을 뱉어내는 블랑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녀는 결국 정신 병원으로 보내진다. 언니를 강간한 남편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살아가는 슬픈 스텔라도 마치와 마찬가지로 그냥 묻어가는 삶일 뿐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고, 그의 누이가 정신병력을 앓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희곡은 충분히 자전적이라 할 수 있다.
술술 읽히는 이 희곡은 평소에 책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불편함 없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무대에 올려진지도 이미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한다.
우울한 내용이지만 어쨌거나 재미있고,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졌다. 이 작품을 영화로 접하지는 못했지만 웬지 지붕 위에서 울려 퍼지는 문리버의 선율과 함께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신경과민의 정신병자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꿈에 대한 이야기로 우울하게 가슴을 파고들 것 같다.
뉴 올리언스에는 진짜로 이름이 욕망(Desire)이라는 전차가 있다고 한다.
이런 문화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도 전차(streetcar)는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특정 버스나 지하철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서 운행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든다. 매일 아침 7시에 수서에서 출발하는 서울 지하철 3호선의 이름은 '소나무', 당고개에서 아침 10시에 출발하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선화'. 일요일 의정부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지하철1호선은 '다람쥐', 여름날 토요일 오후2시 성수에서 출발하는 지하철2호선 열차 이름은 '소나기'... 상상만으로 괜히 뿌듯하다. 모든 것들에 의미가 부여되는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