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호 품목의 경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7
토머스 핀천 지음, 김성곤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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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번역자에 의해 13년전에 출간되고 절판된 바 있는 이 책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7번째 권으로 편입된 사실은 환영할만 하다.

표지는 바넷 뉴먼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사람'이라는 1951년 작품인데, 도대체 진짜 예술 작품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단순한 것이 혼란스럽다. 아마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가장 단순한 표지로 기억될 듯 한 이 표지는 형식이 난해하여 읽다가 돌아서서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몇 차례 반복한 이 소설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베일에 가려진 작가, 토마스 핀천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로 불리며, 매번 발표하는 작품이 중후한 주제와 뛰어난 상상력으로 극찬을 받아왔고, 제임스 조이스에 비견되는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읽기에 거듭 실패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위대한 작품들은 정말 꼭 이렇게 난해해야만 하는가 하는 곤혹스러운 생각이 들지만 어쨌거나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정리는 필요한 것 같다.






에디파 마스 부인은 옛 애인 피어스 인버라리티의 유언에 따라 유산집행을 위해 캘리포니아주 남부의 샌나르시소로 찾아간다.
도중에 언젠가 피어스와 함께 했던 멕시코시티 여행에서 스페인 출신의 망명 화가 레데미오스 바로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회상한다. 삼면화 가운데 '지구의 덮개를 수 놓으며'라는 작품으로, 하트형 얼굴에 커다란 눈과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연약한 소녀들이 원형 탑 꼭대기에 갖혀있다. 그 소녀들이 짜고 있는 태피스트리는 세로로 좁게 난 창문 너머로 아무 소용 없이 공허를 채우려는 듯 길게 뻗어 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건물과 동물, 파도와 배, 숲이란 숲은 모두 담고 있는 태피스트리야 말로 바로 세계 그 자체였다. 에디파는 혼란스러워져 그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에 앞서 그녀는 라푼첼(높은 탑 속에 갇혔으나 지나가던 왕자가 그녀의 머리채를 타고 올라가 구해주었다는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며 이 세계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녀 스스로가 라푼첼이 되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데, 도대체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Bordando el Manto Terrestre / Embroidering Earths Mantle ', 1961
�leo/Masonite (oil on masonite), 1.23 x 1.00 m
Colecci�n Particular, M�xico D.F




에디파는 술집 스코프에서 약음기가 달린 나팔이 그려진 낙서를 발견하는데, 피어스가 유산으로 남긴 우표들 가운데에도 이 기호가 그려진 위조 우표가 있다. 이 기호는 지하로 잠적한 비정규 우편제도 트리스테로를 나타내는 기호이며, 현재는 W.A.S.T.E.라는 명칭으로 소외 계층이 이용하는 지하 우편제도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W.A.S.T.E.는 우리는 조용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 We Awaite Silent Triestero's Empire의 약자이다.) 이렇게 지하 세계를 추적해 가는 사이 남편 무초를 비롯하여 에디파를 둘러싼 남자들은 마약에 중독되거나, 죽거나, 미쳐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그녀를 떠나 버린다. 그러나 에디파는 스스로 세상에 뛰어들어 삶의 주체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트리스테로를 추적하면서 에디파가 발견한 것은 상속권을 박탈당한 주변부 사람들의 삶이다. 에디파가 트리스테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얼굴이 흉하게 뒤틀린 용접공,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년, 유산을 거듭해 온 흑인 여자, 위장병에 걸린 야경꾼, 집이 없어 화물열차나 간이 천막이나 버려진 자동차 속에서 사는 빈민, 병든 선원, 술 취한 사람, 부랑자, 동성애자, 창녀, 정신병자 등이었고, 그들 옆에는 언제나 트리스테로의 나팔이 그려져 있었다. 예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들에게 에디파는 이제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오랜 방랑과 탐색 끝에 그녀의 열린 주파수는 비로소 주변부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교신할 준비가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열림'의 모티프에 충실하게 이 소설은 결론 없이 에디파의 기다림으로 막을 내린다. 작가가 결론을 내리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 해석하라는 의미이다.
트리스테로가 존재한다는 증거에 가까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진다. 트리스테로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에디파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열지만, 동시에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에디파의 인식이 두 배로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트리스테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또 하나의 경직된 진리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리스테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곧 에디파를 열린 체계 속으로 이끄는 바람직하고 건강한 태도이다.
독자들도 그냥 에디파처럼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자는 것이 작가의 의도인 것이다.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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