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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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미여인의 키스'를 처음 접한 것은 13년전 홍대앞 산울림 소극장의 공연을 통해서였다.
당시에 나는 혼자서 자주 산울림 레스토랑에서 4000원 하던 볶음밥을 사 먹곤 했었는데... 산울림 소극장 바로 위층의 그 레스토랑에 가면 손숙, 전유성, 배종옥, 주병진 등 유명한 연예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어서 특히 좋아했던 것 같다.
레스토랑 창밖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구입한 극장표를 들고 여유롭게 극장에 입장하곤 했었는데, 그런 까닭인지 당시에 '거미여인의 키스'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갔다가 당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발렌틴역은 미남 배우 한명구, 느끼한 목소리의 몰리나 역은 요즘 한창 영화와 드라마에서 승승장구 중이나 당시에는 별로 유명하지 못했던 안석환이었다. 스물 다섯 혈기왕성한 청년이던 나는 동성애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다 못해 혐오감까지 갖고 있었기에 게이로 분해 연기하던 안석환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연극 내내 밖으로 뛰쳐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속으로 '아! 짜증나'를 연발했던 것 같다. 오늘 이 소설을 읽고나니 당시 안석환 연기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땐 참 징그럽기만 했었는데...

이 책에 대한 편견 또한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 서른 일곱번째 권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음을 인정하고 싶다.
내가 목표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 전권섭렵(全卷涉獵) 과정에서 만난 멋진 작품 중 한 권이다.


 








성과 정치
성의 억압을 푸익은 현대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남성 우월주의와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이데올로기에 억눌린 인물들을 통해 성을 둘러싼 인류의 관습과 제도들을 문제화하고 있다. 푸익은 이러한 성적 억압이 할리우드식 영화나 멜로드라마가 최상의 가치인 양 제공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푸익은 성에 있어서 음성적이고 터부시되는 모든 것을 탈신비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
동성애자인 몰리나와 좌익 게릴라인 발렌틴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같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고, 감옥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몰리나가 자신이 관람했던 영화들을 발렌틴에게 들려주는데, 그러는 동안에 두 죄수 사이의 관계가 진전되어 간다. 처음에,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는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발렌틴에게는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하찮은 대중문화의 일종이고 동시에 인간을 비정치적이 되도록 세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진보적인 남성임을 자만하면서, 몰리나를 싸구려 감정에 매달리는 여자 같다고 경멸하던 발렌틴은 몰리나에게서 인간의 진정한 애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진전은 소설의 역동성을 마련해 주는데, 그 관계의 절정은 소설 후반에 이루어지는 두 인물간의 성애에서 완성된다.
인간적 합일이라는 구도를 통해 작가는 동성애를 하나의 성도착증으로 터부시해 온 기존 관념과, 여성과 남성을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로 가둬두는 성 이데올로기를 문제삼고 있다. 소설 처음에는 몰리나와 발렌틴이 각각 여성과 남성성을 대표하는 듯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이해와 애정이 싹트고 결국 성적인 합일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작가의 의도는 오히려 그러한 관념들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푸익은 이러한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들의 성에 대한 이론과 반론들을 각주 형태로 제시하는데, 독자들은 각주로 나타난 학문적 텍스트와 인물 사이의 대화로 나타난 허구 텍스트를 계속적으로 대비하고 비교함으로써 능동적 역할을 증대시키게 된다.











소설속에서는 여섯편의 영화 이야기가 거론되는데,
3장과 4장에서 펼쳐지는 독일 정보장교 버너 대위와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모의 여가수 레니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몰리나에게는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나치독일의 선전 영화인 까닭에 발렌틴에게는 짜증나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의견대립이 이 소설의 시작인데... 얼마전에 읽었던 '괴벨스-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도 여러차례 언급된 '레니 리펜슈탈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 속 영화의 주인공 이름 '레니'는 지난 독서의 추억으로 한결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는 바로 이런 영화처럼 편견과 대립으로 시작되지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의 우정과 신뢰와 사랑을 키워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몰리나의 영화에 대한 구술이 소설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거미여인의 키스라... 이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출소전야, 키스를 요구하는 몰리나에게 발렌틴의 한 마디가 정답을 알려준다.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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