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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데카르트 철학을 일컬어 '근대 철학의 효시'라 한다. 〈방법서설〉을 펼쳐든 건 데카르트가 어떤 말들을 했기에 그런 별명(?)이 붙은 건지 내 나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일단 쫄지 말자. 대철학자, 대문호, 거장, 고전 같은 단어에 주눅이 들어 ‘어쩐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만 같은’ 심정을 미리부터 갖지는 말자. 그저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1600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야 책장을 넘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과연 내가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양식(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146쪽)
이럴 수가! 〈방법서설〉 제1부 첫 문장부터 놀랍다. 이 분(데카르트)은 분명히 1637년에 〈방법서설〉을 출간했는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공평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뭔가 평등사상의 냄새를 맡은 기분. 내가 확대 해석한 걸 수도 있지만, 첫 문장을 읽고 놀라는 내 자신을 대견해 하며(뭔가 알아낸 듯하여) 읽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이 좋았다.
〈방법서설〉은 매우 읽을 만했다. 심지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체로 이해할 수 있었다!(쉽게 이해가 되는데도 어쩐지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것만 같아서 두 번 생각하는 찜찜함) 사실 함께 실려 있는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먼저 읽었는데(앞에 실려 있어서),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은 내 정신이 마치 데카르트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데 애를 좀 먹었기 때문이다. 불친절한 글 한편을 읽고 나니(말 그대로 읽기만 한 것) 〈방법서설〉이 흔히 보는 에세이처럼(실제로 '에세이'다) 편안하고 재미있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방법서설’이란 말부터 풀자. 방법에 관한 서설이다. ‘방법(method)’에 대해 차례대로 차근차근 설명(discourse, 敍說)하겠다는 거다. 무슨 방법? 진리를 찾는, 학문하는 방법이다. 그럼 왜 이런 책을 쓴 걸까? 1637이 될 때까지 인류가 학문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아니다. 데카르트의 얘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 “내가 학교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공부하고 여행도 다니고 책도 많이 읽고 사람들도 여럿 만나봤는데, 세상에! 사람마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그러고, 읽는 책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거야. 여행하는 나라마다 풍습도 달랐어. 이건 뭐, 확실하고 명백한 진리라는 게 거의 없더라고. 도대체 뭘 믿고 따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 모든 게 의심스러웠어. 사람이라는 게 뭐야? 이성(理性) 빼면 짐승하고 다른 게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이성을 제대로 쓸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애. 이성을 갖고 있기만 하면 뭐해? 제대로 사용해서 명명백백한 진리를 찾아야 되는 거 아니겠어? 참된 지식을 가져야지 인생도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지혜롭게 사는 게, 그게 바로 행복이야. 자, 그러면 참된 지식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내가 바로 그 방법을 찾았다는 거지! 하지만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억지로 가르치려(설교하려)는 건 아니야. 그저 내가 이성을 잘 인도하려고 그 방법대로 살아왔다는 걸 말하고 있을 뿐이니 오해 말도록.”
그럼 어떤 방법으로 살아왔다는 건가? 데카르트는 본인이 공부한 것 중에 그나마 수학에 끌렸는데, 수학은 확실하고 명확했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도 수학처럼 확실성과 명증성의 토대 위에 놓인다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수학적인 방법을 응용하여 (모든) 학문하는 방법(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삼는다. 어떤 방법인가? ①명석판명하게 내 정신에 (참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만 받아들인다, ②검토할 문제는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눈다, ③가장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 가장 복잡한 것까지 단계적으로 살핀다. ④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열거하여 검사한다.
그렇다. 싱거우리만치 짧고 간단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이 ‘방법’을 토대로 철학을 시작한다(세워나간다)는 것이 함정. 나머지 장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고안한 방법에 따라 확실한 것을 찾아내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문제를 나누어 차근차근 차례대로(형이상학적 토대에서 자연학까지) 고찰해 나간다. '방법'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수단을 마련했으니 진리를 찾아야 하는 것. 그 과정이 나머지 장에 실려 있다.
나는 읽는 내내 데카르트가 강박증 환자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으려 하는 것. 어떤 물건이든 제자리에 오와 열을 맞춰서 두려고 하는 사람처럼, 깔끔한 전제에서 시작해 순서대로, 규칙에 따라 생각해 나가는 것. 정돈되고 균형 잡힌 느낌을 좋아한다는 것(‘정돈’, ‘비율’, ‘규칙’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등등. ‘완벽한, 생각하는 기계’가 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인간이 자신의 재능으로 무수히 많은 자동기계, 즉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음을 … 스스로 탁월한 운동을 하는 기계로 간주할 것이다.”(213쪽)) 생각 속에서만 거대한 세계를 만드는 데카르트, 그 세계엔 인간관계, 도덕, 감정 등이 없다. 계산적이고 효율적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들의 세계라는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왜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효시’일까? 확실히 데카르트가 주장한 방법은 일반적인 학문의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방법을 통해 애매모호한 건 모두 보류하고, 이성을 제대로 사용해서 삶에 유용한 지식에 이를 수 있는 바,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변적인 철학 대신에 실제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 이 모든 것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220쪽) 데카르트 이후의 세계는 알다시피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 밖에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해 그럴듯하게 말하는 수단과 학식이 적은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사게 하는 수단을 제공해주며…”(152쪽)라든가, “학자가 하는 사색이란 아무런 결과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상식에서 벗어날수록 더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기지와 기교를 부리기 때문에 단지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다.”(157~158쪽)라고 말하는 등,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삼는 학자(특히 철학자, 수사학자 등)들을 비판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이다. 기대(?)보다 얇고,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내용이 쉽고 심지어 재미있다. 데카르트가 생각을 밀고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동의도 하고 반박도 하게 된다. 아니,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유용해지는 책이다.(자랑거리가 되므로)
덧붙이는 말.
내게 있는 번역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현복이 옮긴 문예출판사판(2014, 초판1쇄 1997)이고 다른 하나는 최명관이 옮긴 도서출판창에서 나온 책(개정판, 2014)이다. 번갈아 읽었는데 둘 다 괜찮지만 문예출판사판이 더 좋은 것 같다.
문예출판사판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도 함께 있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은 〈방법서설〉의 ‘방법’에 집중해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심화해 놓은 것이다.) 문예출판사판이 옮긴이의 주해가 꼼꼼해서 읽기 좋았고 번역도 최명관에 비해 성실한 느낌이었다. 불어를 모르니 원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번역본에서 서로 다르게 번역한 부분을 몇 군데 찾을 수 있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최명관은 "나 자신을 연구하기로"(76쪽)라고 번역한 것을 이현복은 "나 자신 속에서 연구하기로"(158쪽)라 번역한 것이다. 최명관은 아무 설명도 없지만, 이현복은 주석을 달아서 그렇게 번역한 이유와 의미를 짚어준다.
문예출판사판에는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과 <방법서설>, 주해, 옮긴이의 해설, 데카르트 연보가 실려 있고, 도서출판창판에는 역자가 구성한 <데카르트의 생애>와 <방법서설>, <성찰>, <데카르트 연구>(옮긴이 논문)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185쪽)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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