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다. 책은 종이로 만들어졌으니, 그 신체적(물질적) 운명의 시작은 역시 나무였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어린 줄기와 가지, 잎사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갖은 풍상과 세월의 기억을 간직하며 우뚝 자랐을 것이다. 곧바르고 웅장하게 자랐을 때쯤, 인간의 손으로 쓰러져 갖가지 방법으로 마름질당한 끝에 결국 종이가 되었을 것이다.
종이에 찍히는 활자는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으니, 그 의미론적 운명의 시작은 역시 어느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첫선을 보인 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어느 사이에 생각의 열매가 맺혔을 것이다. 그 열매가 탐스럽게 익었을 때쯤, 갖가지 생각의 자취가 갈무리되고 글의 모양새가 꼴을 갖춘 끝에, 결국 활자가 되어 종이에 찍혔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은 결국 자연과 인간, 우주와 자아가 만나는 자리인 셈이다. 그 만남이 반드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어서, 어느 한 그루의 나무와 어느 한 사람의 만남이 "그들만의 외로운 만남"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무수한 사람들의 축복 속에 무척이나 화려한 만남이 되는 경우도 드물게나마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만남의 당사자들의 물질적 생명이 끝난 뒤, 긴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여전히 그 만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마저 있다. (우리는 그러한 만남을 보통 "고전"이라 부른다.)
여하튼, 나무에서 출발한 책의 신체적 생명이 다하는 날, 그 최후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 없다. 다시 한번 여러 방법으로 마름질되어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 가거나(그러니까 다시 책으로 태어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바람결에 부질없이 날리는 한 무더기의 먼지로 산산히 부서지거나..... . 물론 그 의미론적 생명만은 어떤 의미에서 불멸에 가까운 것이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하게 자리잡아 언제까지나 이어질 경우도 있다.
그런 "불멸의 생명"들은, 지금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태어나 자라나고 있을 한 그루의 나무와 한 그루의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게 될 것이다. 결국 책이라는 존재의 신체적 생명의 윤회가 가능한 것 처럼, 그 의미론적 생명의 윤회 역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 무한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감동하고 화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자"라는 이름의 사람들!
무척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독자"에서 "필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 될지도 모르는, 어쩌면 나무와 인간의 불행한 만남을 주선하게 될지도 모르는, 악업을 쌓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책으로 지은 악업이야말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사슬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나는 필자가 되고자 마음 먹거나 이미 필자인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을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독자들을 윤회의 사슬로 유혹하는 사탄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렇게 본다면 번역자들이란 사탄의 하수인들인지도 모른다.
필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무언가 쓰기로 결정하기 전에, 한 그루 나무 앞에 홀로 서서 나무에게 말을 건네보라고 말이다. 나무를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거든, 그때 가서 다시 한 번 나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펜을 잡던가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번역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무언가 번역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원서를 앞에 놓고 그 원서가 탄생하기까지 억겁의 세월에 걸친 나무와 인간 사이의 인연의 사슬을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그 책을 번역할 경우 번역서가 앞으로 쌓게 될 무수한 업보의 무게가 두렵지 않거든, 그때 가서 저자와 한 그루 나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펜을 잡던가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하라고 말이다.
그러니 필자든 번역자든, 자신의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반드시 심을 일이다.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환경이라면, 꽃이든 풀 한 포기든 자신의 방 안에 화분을 놓아 둘 일이다. 영화 속의 레옹이 소중하게 보살폈던 그런 화분 말이다.
출처-kung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