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마을에 하나 뿐인 우물은 으례히 고약한 용이 지키고 있고,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처녀를 상납해야만 하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어렸을 때 보고 듣고 자랐던 거 같다. 엇비슷한 이런 이야기는, 마을에 평민처녀가 없어 공주가 마지막으로 상납되어지는 순간 짜자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올해 초3인 아들녀석이 질문을 한다.
"엄마! 생명은 소중한 건데 물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바쳐야 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아?"

"어! 어.... -_-;  듣고 보니 그렇네."
그 순간 어렸을 때부터 으례히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는 것이 너무나 또렷히 인식되었다.
왜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단.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증폭되면 될수록 아들 녀석이 기특하기만 했다.
순간 당황한 나와 아들의 대화는 '생명은 소중하다. 물을 구하기 위해 딸을 바쳤어야 했다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차라리 딸 가진 가족 혹은 마을사람들이 뭉쳐서 용과 싸웠으면 됐었을 것을. 고작 왕자 한명으로 용이 KO패 당했는데 말이야. 그치??' 로 급 마무리됐다.

자식의 청출어람은 부모의 큰 기쁨이다.
자의반 타의(부모)반 다독을 한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진짜 궁금하다.

반면, 지금 10대가 만들어 낼 세상이 궁금한 또 하나 장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전, 강남 유일의 ㄱ사립초교를 보내고 있는 친구의 말은 또 다른 측면에서 궁금증과 염려증을 불러일으킨다.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사"자 직업을 가진 경우 그 아이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본다는, 그 학교 학부모인 친구는 집에서 '밥'을 해 식구를 먹인 적이 없고, 자기들은 '유기농 쌀'만 먹는데(가끔 유기농 카레를 데워 먹기 위한 용도의 밥이다) 마트에서 산 쌀이 너무 맛이 없어 막내아들 장난감으로 갖고 놀게하다 버린다며, 진짜로 쌀을 갖고 놀고 있었다!
친구 자식이라도 지나친 행동은 어른으로서 한마디 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4살짜리 친구 아들에게 아주아주 살짝 "그건 안되는거지?" 했다가,
자기 애는 태어나서 단.한.번.도. 안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가족도 아닌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서 우리 아이가 당황해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이건 뭐….
친구집에서 머문 2~3시간은 완전 딴세상 - 너무 아득한 물과 기름의 세상을 붕붕 떠다니는,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엄마가 바로 나였다.
X같이 더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으로부터 '니가 정상이다'란 위로를 들으며 현실의 나로 돌아왔지만, 이런 아이들과 평생 살고 부딪혀야 할 우리 아이들이 걱정됐다.
같은 세대를 사는데 경제적 차이로 인한 백만가지 문화적 차이를 겪는, 출발선부터 달라 발생한 이 모든 차이가 과연 극복이 될 것인지...너무 궁금했다.

그 당시 7살이던 아들과의 대화는, 딱히 의견이랄 게 없고 엄마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지라 달리 기억나는 건 없다. 지금도 그럴거 같다. 뭐, 달리 할 말이 있으랴.
생명은 소중한 건데 물을 구하기....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수준인만큼 백만가지 문화적 차이가 나는 친구들과 잘 조율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아이들이 만들어 갈 세상, 그 세상의 주체에 나도 포함되 있음을 인식하며...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할 것이다.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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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07년 상반기, 나름 따기 어렵다 소문이 난 금융부분 자격증 하나를 취득한 후 2005년부터 진행중이던 금융 버블 속을 신나게 질주했었다. 거침없었다. 실물과 금융 모두 호황을 누렸으며 게다가 이론까지 겸비하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만났고 2009.1월, 관계사에서 받은 이 책을 우연히 펼쳐본 후 나는 완.전. 절망하여 이 후 몇개월 동안 독서도 끊었다.

이 책은, 백조는 당연히 흰색이며 검은 백조(블랙 스완)가 없다는 과거의 경험이 행동의 준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견해를 더욱 정당화하는 역설을 만들어내곤 하는데, 이는 화살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능력의 한계 탓으로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통해 더 드러난다 한다. 그 결과 우리의 이해는 목표를 벗어난 화살이 되기 십상이며 이는 '학습의 저주'를 받은 헛똑똑이(지나치게 틀에 잡혀 생각하는 사람)를 양산해 낸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은 "정규분포곡선, 그 거대한 지적 사기" 이다.
그 당시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정규분포곡선에 근거에 상관계수, 표준편차 운운하며 투자자산 조합(포트폴리오)의 합리성을 설파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이 "사기"라니! 그저 사기에 불과한 것을 모른 채 예쁘게 포장하고 합리화해 최신 무기인 양 남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분포곡선, 상관계수, 표준편차 - 과거 자료를 수집하여 미래를 예측하던 나는 호되게 당했다. 절망스러웠다. 처참하게 당할 것도 모른채 그 공부를 했다고 자랑스러워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굉장한 것인양 떠들어댔던 내 모습이 수치스러웠다.
수치가 조금만 변해도 복리 효과탓에 미래의 모든 숫자가 변하는 것인데, 그 수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알았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눈 앞의 것도 예측 못 할진대, 좀 더 먼 미래의 것을 예측하겠다며 나대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빈껍데기 전문가 - 오류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측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 -일 뿐이었다.

자산관리의 제1원칙이 자산배분인데, 상관계수와 표준편차로 위장한 투자자산 세계 안에서의 배분이 그것인 줄 착각한 것 또한 너무 괴로웠다. 은행예금 (혹은 국공채)과 투자자산 간의 배분이었어야 했는데 투자자산 내에서 상관계수 낮은 것들끼리 아무리 엮어봐야 무너질 때 한방이었던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을 그 당시는 너무 몰랐다.
직장 내 위치에 떠밀려 자산관리 제1원칙을 모른 척 해야했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위안이 되지 않았다.
괴로웠다.
그리고 약도 올랐다.
저자는 진작에 '블랙 스완' 출현을 알고 대비했기에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서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다며, 은근히 뻐기는 자세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아니꼬왔다. (아, 그 당시 난 그렇게 봤다) 아니,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저자가 알려준  '블랙 스완'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 기르기를 포기했기에.(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다)

"인생을 좌우할 사건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행운이며 희귀 사건이며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의 사건이다."

며 끝을 맺는 이 책을 지옥에나 던져버리고픈 심정이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았쟎아? 난 이렇게 살아! 나처럼 하고 싶다고? ㅋㅋ 그냥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행운이고 블랙 스완이니 그냥 감사해~!"

으... 뼈아픈 자책과 반항할 기운도 없는 감정의 훼손을 당한 나는, 지식을 쌓고 책을 읽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로 발전하여 한동안 책을 쉬었다. 도대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와 책을 읽은다한들 나아진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다시 책을 집어들고 나서도 굉장히 오랫동안 이 책은 내게 불쾌한 책으로 남아 있다가 최근 들어 아주 조금씩 복권되고 있다.

"예측하려 애쓰지 말고, 다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라.
 과거의 오류에서 배우기보다는 감정에 쏠려 미래를 투사하는 정신적 장애와 왜곡이 우리에게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나약한 투자자일 뿐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감정은 회복 되어 갔고 '블랙 스완'을 통찰하기 보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자세를 기르게 되면서 이 책이 그저 불쾌한 책으로만 기억되지 않게 됐다.
 


 

읽은 날 : 2009. 1. 2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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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 이 책을 읽게 된 근저에는 <딜리셔스 샌드위치, 유병률> 영향이 있었다. 유병률은 글을 안 쓰면 리더가 될 수 없는 시대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글을 안 쓰면 영원한 객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글을 안 쓰면 무능해 보이고, 돈도 벌기 어렵고, 딜리셔스하게 살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이제 글이 힘이고, 돈입니다.  카리스마고, 리더십입니다.  글쓰기가 샌드위치세대의 생존력이 됐습니다.  아니, 글을 안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대입니다"

글을 안 쓰기에는 아까운 시대라...아까운 마음은 전혀 없었으나, 관심의 확장 차원 그리고 가수 이적의 추천도서라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게 됐다.
초반부 스티븐 킹의 자전적 이야기는 무척 유쾌하고 재미있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지루했다. 난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 꼭 이걸 읽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래도 다음의 문구는 아직까지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지금까지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니다. 굳이 필요가 없는 낱말"
"그리고 부사는 쓰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지만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라고 쓰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비범한 능력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서가 지적해준 글쓰기에 대한 부분을 보면, 스티븐 킹도 지적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글쓰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젊은 작가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출판에 신경쓰지 말고 작품에 신경을 쓰라고 말입니다. 어떤 작품을 창작하려 할 때 출판하려고 서둘지 않기를, 독자를 염두에 두기를, 그리고 마음 속에 진실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지 어떤 사건이 그에게 경이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것을 쓰지는 말기를, 그리고 그 자신의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 쓰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블로그를 시작한 나로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충고다. 창작, 출판과 거리가 멀지만, 썰렁하게 비어있는 블로그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데 나의 독자(앞으로 중고등학생이 될 우리 아이들)를 염두에 둔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럼에도 쓰고 싶은 게 빨리 생기도록 내 마음에 부채질을 해대곤 하는데, 그 쓰고 싶은 줄기가 꼬이거나 엇나가지 않도록 예의주시 해야만 한다. 이런 예의주시 과정을 겪노라면 데릭 젠슨이 말한 "글쓰기는 과정을 겪는 일"이라는 것에 백번 공감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한글자씩 더디게 늘어가는 글을 보면 그 결과물에 대해 항상 의문이 생기는데, 스티븐 킹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러다가 시든 소설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발표한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게서 하늘이 주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듣게 마련이라는 것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마 마흔 살 때였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그림이나 무용이나 조각이나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의 기분을 망쳐놓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진심으로 글을 써나간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그렇다해도 내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지리라 믿으며 그가 말한 "비범한 능력" 이 향상되길 소원해 본다.  아울러, 좀 더 쉽고 재미나게 쓰는 능력까지!
 


 

읽은 날 : 2008. 12. 03.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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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놀라움'이다.
토종 한국인이 아님에도 더 한국인 같아서, 우리 문화. 역사를 너무 잘 알아서, 우리 글을 너무 잘 써서. 어찌 이럴 수가!

무엇이 한국인이란 걸까. 생각해 보니 그저 한국에 태어나 한국인 부모를 둔 것이 보편적인 '한국인'인 듯 하다. 각자가 선택한 일이 아닌만큼 그 속 모양은 다양할 것이나, 대한민국이라는 큰 프레임에 갇혀 있기도 하다.
박노자도 한국인이다. 우리와 달리 국적을 선택한 적극적인 한국인. 태어나자마자 한국인이 된 우리와 달라서인지 그의 시선은 무척 날카롭다.
반면, 강준만, '한국인 코드' 는 포근하다. '한국인 코드'는 우리의 이런 단점은 이러저러한 부분을 이겨내고자 한 이면이라며 독자에게 위안을 준다. '한국인 코드'도 그대로, '당신들의 대한민국' 또한 그대로 각각 진정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은 의식하지 못한 일상 속의 권위주의를 콕콕 찍어 얘기해 아렸고, 언제나 그러하듯 여겼던 불교의 이속 離俗 은 평소에 얼마나 관행적으로 사물을 대했는지 절감하게 해준다. 교수인 그의 직업을 살린, 착취 공장이자 지식 시장의 명품 백화점이 된 한국 대학에 대한 얘기는 그야말로 직설적이며, 이주 노동자 (外勞, 外奴)에 대한 얘기는 내가 얼마나 주변에 무심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반면, 미국적 사고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되지 않았다며 '시일야방성대곡'을 논하는 부분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가볍게 스케치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가 지적한 한국인들의 철저한 자기비판 정신이 지금도 많은 외국인을 놀라게 한다며, 한국  사회에 틈입한 그가 한국인임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성 요소로 "한국 문화의 놀라운 보편성"을 언급한다.
우리 생활에 직격탄이 되는 중대한 사항들엔 굉장히 무관심하며 연예인 가십은 빠르고 정확하게 아는 많은 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일이 잦은데 (나 또한 그런 부분이 있다) 그의 말(자기비판 정신)이 정말일까 싶다. 비슷한 얘기를 "지식인의 죽음" 에서도 보긴 해서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이 기댈 수 있는 미래 산업 - 학력과잉이 지식 생산으로 승화하길 바라고, 동양 사상의 보편주의를 살려 민족주의를 벗어나 인류의 선두에 서길 바란다.
그 중 너무나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서로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연대 의식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으며,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도살을 막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복지사회로 가자면 아마도 이와 같은 대투쟁의 준비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그런데 그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준비 작업들이 필요하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의 준비다."

가장 영감을 준 글귀다. (그래서, 서재소개 모티브로 삼았다)

아무리 그가 한국학 교수라지만, 그저그저 놀라울 뿐인 이 책을 읽게 되어 무척 고맙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 피와 살이 된듯한 기분을 안고,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완독에 대한 뿌듯함을 또 한번 느낀다.
 


 

읽은 날 : 2011. 10. 08.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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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 비강남권에 살다 얼마전 소위 "강남"의 핵인 이 곳에 왔을 때, 당췌 적응되지 않았다. 내게 익숙했던 부와 미의 기준이 너무 달라, 과연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그들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헷갈렸다. 그러다 그들과 나의 다름을 깨닫고 다시 정착민이 되어 살고 있던 중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박민규는 부와 아름다움이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르기가 되었다며, 이러한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보자 한다. 왜냐면 가능성의 열쇠를 우리가 쥐고 있으니 - 그건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강남 한복판에 살고 있으니 그들이 다수고 나는 소수였다. 하여 나는 지금 천천히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 "부모님이 찍으라 해서 찍었고, 나경원 이쁘쟎아!" 주변 대세가 이런 분위기라 박원순 당선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 직원 대부분이 강남에 산다 : 비강남이라 쪼금 X 팔린가?  나도 강남 가야 하나?
- 여자인 경우 외모가 절대적 기준이다 : 노력을 하나 외모가 부족하여 당하는 불이익은 거의 당연하다.
- 남자인 경우 '키'가 매우 중요하다 :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도 욕 먹을 수 있다.
- 부모대부터 강남人인 경우에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 소위 '간지'를 지키기 위한 분수 이상의 과소비는 매우 당연하다.
 

주변 상황이 이러다보니,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존재가 내게 너무 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번 선거의 결과가 내겐 너무 낯설음이었고, 생각보다 지나친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일진대 어쩜 이리도 다른 것인지, 그 답은 환경에서 찾을수 밖에 없을 듯 하다. 특히 이것이 가능하게 된 가까운 이유는 교육이 아닐까?

"일부 수도권 지역에서 모여 사는 현대판 경화벌열(조선 후기 한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벌 세력)들이 명문대를 장악한 현상은 이미 1990년대에 뚜렷하게 나타났고, 이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2, 박노자)"

소위 SKY 진학문제와 진정한 학력 차별없이 그들만의 세상에 로그인할 수 있다면,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강남 VS 비강남의 문제는 개인의 교양으로 해결되기엔 너무 뿌리깊고, 각 개인의 교양조차 욕망에 대한 개인의 주권부분이라는 점에서 승리확률이 매우 낮은 게임일 뿐이다. 결론은 제도화, 시스템 구축인데 다수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올바른 투표권 행사가 대표적이지 않은가!

부지불식간에 스며드는 '강남인식'을 틈틈히 경계해야 하며, 말은 이렇게 해놓고 10.26 선거 불참을 한 자신을 꾸짖는다. 
 


 

읽은 날 : 2011. 6. 27.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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