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이야기, 얀 마텔>
이 책 <파이 이야기>, 어디에 촛점을 맞출까.
엄청난 재미?
은유와 비유 속에 담긴 굉장한 무엇?
아. 그래. 하나씩 풀어가보자. 과연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직접적인 경험이 담긴 책을 종종 만나왔다. 간접경험과 방대한 연구, 조사의 수고로 탄생
한 작품도 훌륭하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이길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경험이 작가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동 받기 어렵다. 경험이 제대로 글 속에 녹고, 여러
가지 양념이 더해져야 독자가 '감동'받는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제5도살장>이 그런 책이었지만, 이젠 이 책 <파이 이야기>도 당당하게
대열에 합류했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16살 때 227일 동안 구명보트에서 태평양을 포류한 이야기이다. 16살 소년
이 탄 보트 안에는 벵골 호랑이 한 마리 있었다 한다.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좁은 구명보트에 같이 있었다 한다.
정말일까?
아무렴. 정말이고 말고.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는데, 이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스포일러가 되면 안된다. 이 책이 가진 엄청난 비밀을 말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을 말하지 않고선 리뷰를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부족한 내 글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면 안되니까.
16살 소년 파이는 어느날 조난객이 된다. 조난객이 된다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
이라 한다. 바다와 하늘이 제 아무리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고 조난객의 시선은 언제나 반
지름 반경이 되는 원의 중심점.
원의 중심점에 선 조난객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권태와 공포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은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
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느끼게 되는 '권태'. 반복되는 공포가 권태가 된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어
지는 나른함이다.
공포와 권태의 추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16살 소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랑이 덕이
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앞에는 커다란 호랑
이가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진다.
그 순간, 16살 소년은 벵골 호랑이를 길들이기로 마음 먹는다.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를 잊어버
리게 만든 호랑이가 있어 한편으로 다행이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당장 낚시를 하고 바다거북을 잡아 호랑이에게 던져준다. 소년은 호루라기를 불어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는 자가 누구인지, 호랑이가 침범하면 안되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인지시킨
다. 매 일마다 집중하면서 생존해 간다. 그렇게 호랑이는 소년에게 고난을 견디게 해준 '고난'
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소년이 호랑이에게 생명을 받은 대신 소년의 내면, 뭔가가 죽었고 다시
는 되살아나지 못한다.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오후에는 죽으리라."
호랑이도 날씨처럼 무의미해지면서 싫증이 나던 어느날, 소년의 구명보트는 육지에 도착하고
드디어 227일 생존기의 방점을 찍는다.
방점의 그날, 소년은 아이처럼 운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다. 소년이 흐느낀 것은 호
랑이가 아무 인사도 없이 그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 할 신세를 졌구나. 네가 없었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호랑이가 소년에게 그저 고마운 대상이기만 할까.
호랑이덕에 살았지만, 호랑이 때문에 소년이 잃어버린 것은 '생명'에 버금가는 그 어떤 것이었
으니.
이 소설이 '실화'인지 여부는 모른다.
이 책의 작가, 얀 마텔이 계속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실화일 것 같다.
왜냐하면 소설 출간 후 얀 마텔의 행동이 그렇게 답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002년 부커상 수상 후 40개국에서 출간되며, 부커상 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지만,
"소설의 운명은 반은 작가의 몫이고 반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작품은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된다."고 말하는 마텔이 신문,TV, 쇼핑을 멀리하고 창작과 요가에 전념
하는 한편, 말기암환자병동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몬트리올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어서, 왠
지 그럴것만 같다.
이 소설은 작가의 직접경험 그 이상의 작품이거나
직접경험이 아닌데도 이렇게 훌륭한 작품, 둘 중에 하나이다.
부커상 : 1969년 영국의 부커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씌어진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한다.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며,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읽은 날 2012. 4. 26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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