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속 숫자의 거짓말 - 정부와 여당, 기업, 정치가는 통계로 우리를 어떻게 속이고 있는가?
게르트 보스바흐 & 옌스 위르겐 코르프 지음, 강희진 옮김 / Gbrain(지브레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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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 속 숫자의 거짓말, 게르트 보스바흐, 옌스 위르겐 코르프>

 

간혹 '똑부러진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건 말투 영향이 큰 탓일뿐  실제로 똑부러지는 성격은

아니다.

귀도 얇고 판단도 즉흥적으로 하고  때로는 신중하지 못하는데,  가끔 그게 '열정'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지금은 귀는 두껍고 판단은 진중하다. 다시말해, 오랫동안 '열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회사에서 각종 그래프와 수치 속에 둘러쌓여 있었다.

빼곡한 숫자로 이루어진 통계표보다 시각화되있는 그래프가 훨씬 눈에 들어왔고 타인을 설득

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때 봤던 그래프에 담긴 진실이 어떠했든간에,  그래프를 믿은 대가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참

혹했다. 지금은 숫자와 그래프를 맹신하지 않는다. 그저 다만, 공포와 과욕 그 어디쯤 서 있는

지 되묻고, 공포일 경우 용기를 좀 더 내고 과욕일 경우는 가지를 쳐낸다.

 

이 책 <통계 속 숫자의 거짓말>을 그때 봤었더라면, 그래프와 숫자를 덜 맹신했을까.

 

이 책은 독일의 통계학 교수인 게르트 보스바흐와 환경, 철학, 수치 심리학 입장에서 기술한

옌스 위르겐 코르프가 공동 집필한 책인데, 둘의 재치가 재미있다.

 

"곁에서 옌스가 자꾸만 핀잔을 준다. 내가 제시하는 음양이론이 결국 내 지식을 뽐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억울하다."

 

"내가 y축을 잘라낸 이유에 대해 따지자 해당 연구원은 통계 분야에서 흔히 행해지는 아주 일

상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속 시원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었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인간적인 표현 속에 담긴 내용은 깜짝 놀랄 것들인데, 그들은 범죄라 불러도 좋을만큼의

대담한 창의성이라 표현한다. 어디 한번 보자.

 

 

이 그래프에 약간의 생략과 역동성을 가미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쨔잔~!

 

 

어떤가. 정말 범죄 수준이다!

 

5 여년전 할머니께서 고관절로 쓰러지셨다. 그 당시 의사에게 들은 말은,

"6개월 내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률 50%, 1년 내 사망률 100%입니다." 였다.

그 당시 이 말은 수술하지 않으면 '1년 내 사망'이라는 귀결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그렇게 듣지

않을 수 있을 거 같다.

백분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 대상이다. 나아가 백분율은 백'분'율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분자와 분모의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자만 언급

할 뿐 분모가 무엇인지는 아예 밝히지 않는다.

 

5 여년 전 의사의 말에 분모를 추가해 보자.

"고령의 고관절 환자 000명 중 6개월 내 수술하지 않은 2명 중 한 명이 사망했고, 1년 이내 나

머지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위의 말 대신 이 말을 들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경황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 숫자 대신 다음과 같은 교묘한 포장술도 조심해야 한다.

가령, "외국인들은 다 범죄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추방해야 마땅합니다!" 라는 직설적

구호를 외치는 대신 "이 땅에 외국인들의 수가 늘어난 뒤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인과관계의 함정인데, 시간적 순서가 맞아 떨어진다 하더라도 A가 반드시 B의 원인이

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부지불식 간 우리는 숫자를 맹신하다. 그 이유를 따지고 보면 "수치가 그 자체로 중요할 때보다

는 결국 시간 혹은 돈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할 때가 더 많은 것" 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숫자가 숫자 이상의 의미로 말을 걸어올 때, 한번 더 조심히 살펴봐야 한다.

혹시, 진실을 가장한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결과로 유인하는 건 아닌지.

 

이 책을 읽은 지금,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다면 숫자와 그래프를 덜 맹신할까.

...자신할 수 없지만, 수치와 그래프의 현란한 기술 속에 때로는 진실이 왜곡돼 있음을 이제는

안다.

 

 

읽은 날   2012. 5. 7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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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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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이야기, 얀 마텔>

 

이 책 <파이 이야기>, 어디에 촛점을 맞출까.

엄청난 재미?

은유와 비유 속에 담긴 굉장한 무엇?

아. 그래. 하나씩 풀어가보자. 과연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직접적인 경험이 담긴 책을 종종 만나왔다. 간접경험과 방대한 연구, 조사의 수고로 탄생

한 작품도 훌륭하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이길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경험이 작가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동 받기 어렵다.  경험이 제대로 글 속에 녹고,  여러

가지 양념이 더해져야 독자가 '감동'받는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제5도살장>이 그런 책이었지만, 이젠 이 책 <파이 이야기>도 당당하게

대열에 합류했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16살 때 227일 동안 구명보트에서 태평양을 포류한 이야기이다. 16살 소년

이 탄 보트 안에는 벵골 호랑이 한 마리 있었다 한다.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좁은 구명보트에 같이 있었다 한다.

정말일까?

아무렴. 정말이고 말고.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는데, 이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스포일러가 되면 안된다. 이 책이 가진 엄청난 비밀을 말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을 말하지 않고선 리뷰를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부족한 내 글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면 안되니까.

 

16살 소년 파이는 어느날 조난객이 된다. 조난객이 된다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

이라 한다.  바다와 하늘이 제 아무리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고 조난객의 시선은 언제나 반

지름 반경이 되는 원의 중심점.

 

원의 중심점에 선 조난객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권태와 공포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은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

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느끼게 되는 '권태'. 반복되는 공포가 권태가 된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어

지는 나른함이다.

공포와 권태의 추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16살 소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랑이 덕이

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앞에는 커다란 호랑

이가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진다.

그 순간, 16살 소년은 벵골 호랑이를 길들이기로 마음 먹는다.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를 잊어버

리게 만든 호랑이가 있어 한편으로 다행이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당장 낚시를 하고 바다거북을 잡아 호랑이에게 던져준다.  소년은 호루라기를 불어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는 자가 누구인지,  호랑이가 침범하면 안되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인지시킨

다.  매 일마다 집중하면서 생존해 간다.  그렇게 호랑이는 소년에게 고난을 견디게 해준 '고난'

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소년이 호랑이에게 생명을 받은 대신 소년의 내면, 뭔가가 죽었고 다시

는 되살아나지 못한다.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오후에는 죽으리라."

 

호랑이도 날씨처럼 무의미해지면서 싫증이 나던 어느날, 소년의 구명보트는 육지에 도착하고

드디어 227일 생존기의 방점을 찍는다.

방점의 그날, 소년은 아이처럼 운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다. 소년이 흐느낀 것은 호

랑이가 아무 인사도 없이 그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 할 신세를 졌구나. 네가 없었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호랑이가 소년에게 그저 고마운 대상이기만 할까.

호랑이덕에 살았지만, 호랑이 때문에 소년이 잃어버린 것은 '생명'에 버금가는 그 어떤 것이었

으니.

 

이 소설이 '실화'인지 여부는 모른다.

이 책의 작가, 얀 마텔이 계속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실화일 것 같다.

왜냐하면 소설 출간 후 얀 마텔의 행동이 그렇게 답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002년 부커상 수상 후 40개국에서 출간되며, 부커상 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지만,

"소설의 운명은 반은 작가의 몫이고 반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작품은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된다."고 말하는 마텔이 신문,TV, 쇼핑을 멀리하고 창작과 요가에 전념

하는 한편, 말기암환자병동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몬트리올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어서, 왠

지 그럴것만 같다.

 

이 소설은 작가의 직접경험 그 이상의 작품이거나

직접경험이 아닌데도 이렇게 훌륭한 작품, 둘 중에 하나이다.

 

 

부커상 : 1969년 영국의 부커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씌어진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한다.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며,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읽은 날  2012.  4. 26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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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알프레드 랜싱 지음, 유혜경 옮김 / 뜨인돌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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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알프레드 랜싱>

 

앤 페디먼이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자투리 책꽂이'에 대해 얘기한다.

 

"모든 사람의 서가에는 자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다. 이 책꽂이

에는 나머지 장서와 상관없는 주제들을 가진 이상한 책들이 몇 권 모여있는데, 가만 보면 장서

임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녀의 자투리 책꽂이에는 극지방 탐험에 대한 책이 64권이나 있는데, 그녀는 특히 아문센에게

패한 영국인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한다.

비록 그녀가 애정하는 스콧 대령은 아니지만, 이 책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제목을 본 순간 이

책을 나의 자투리 책꽂이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비교할 수 없는 빈약한 내 자투리 책꽂이를 이 책 두께만큼 채우고 싶었다.  외로이 꽂혀

있는 '건강', '자기계발', '문화/예술' 류 책에게 친구가 생겼다. 물론 분류할 수 없는, 읽지 않은

분야 책들은 언제까지나 간택을 고대할 것이다.

 

20세기 초,  아문센과 스콧이 경쟁적으로 남극 탐험을 시도하고 있을 당시,  어니스트 H.섀클턴

(1874~1922)은 한발 늦게 진입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가 후발

주자였기에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문센이나 스콧보다 먼저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섀클턴이든, 아문센, 스콧이든 내게는 모두 앞선 시대의 '극지방 탐험가'로 엇비슷하다. 내 눈에

띄인 이 극지방 탐험가 섀클턴은 당분간 아문센이나 스콧을 만나지 못할 거 같다. 자투리 책꽂이

주인은 생각보다 야박하니까.

 

섀클턴은 스콧과의 첫번째 탐험에서 괴혈병으로 중도하차한 후 두 번째 탐험에서 스콧보다 580

km나 기록갱신을 세우고 전 대원을 무사귀환 시킨다. 당시에 전 대원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섀클턴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영국 국왕으로부터 '경'이라는 칭

호를 받는다.

그 후 섀클턴이 떠난 세 번째 탐험이 이 책의 내용이며, 그는 네 번째 탐험에서 죽는다.

 

이 책은 '전 대원 무사귀환'을 이룩한 리더로서의 섀클턴 면모에 집중한 책이라 한다.

가령, 팀의 결속을 흐트러뜨리는 문제의 대원을 조기 발견하고 자신의 텐트 멤버로 선정해 밀착

상담했다든지, 다음과 같은 상황이 대표적인데.

 

"섀클턴은 이미 한달 간의 식량을 확보했으니 그 물개들은 그냥 그곳에 놔두라고 단호하게 지시

했다. 몇몇 대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섀클턴의 이런 불굴의 자신감은 극단적인 낙관주의로 나타났고, 그건 두 개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대원들의 마음 속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그로 하여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356페이지 중간중간 간단히 나오는 그의 리더로서의 활약상은 그저 모호하기만 했다.

대신 극지방 탐험다운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가령.

 

"하루 이틀도 아닌 수 개월을 해가 없이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

코 알 수가 없다. 만성 심장병으로 죽기도 하고, 어둠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 스트레스를 견디

지 못해 일시적으로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된 사람도 있었다.

 

할 일도, 할 말도, 볼 것도 없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방수 파카를 말리기 위해 그의 머리통만한 돌멩이 두 개로 눌러 놓았는데 돌멩이도 파카도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없었다."

 

약한 내 체력으로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뿐이다.

때로는 맨손으로 노를 젓고, 폭풍우 속에서 비와 바닷물에 연신 몸이 적고, 피곤한 몸을 뉘일 슬리

백도 빳빳하게 얼은 환경에서 생존해 나간다.

 

기초적인 생활이 안되니 사람다운 생활은 말해서 뭣하랴. 주문할 때 '축음기용'이란 단어를 빠뜨

려 쓸모없게 된 무용지물 바느질용 바늘 5천개,  30cm 혹은 그보다 더 긴 거대한 붉은 기생충을

박멸할 약을 챙기지 못한 부주의.

 

이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불확실성'이었을 것이다.

텐트가 쳐진 곳은 얼음, 그것도 바다에 떠 있는 부빙이다. 정착도 아닌, 표류도 아닌 불확실성 속

에서 눈에 보이는 '얼음'이 어떤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육지조차 부빙

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차라리 절망이었다.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 저주이기만 한, 희망을

가지기 힘든 불확실한 생활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나 같은 허약체질은 극지방 탐험 배에 승선할 수도 없지만, 그런 추위와 열악한 환경에서는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탐험을 시작했지만, 그들이 처했던 열악함의 극치는 왠지 내게

먼 나라 일같다. 활자의 조합이 생생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리더로서 섀클턴의 면모도 그렇고.

위대한 탐험의 두근거리는 시작은 활자로 이루어진 흥분해지지 않는 기록물로 내게 남겨졌다.

 

섀클턴이 직접 썼다면 훨씬 나았을까.

대원들의 일기와 인터뷰를 통해 묘사한 글의 한계일까.

 

그래도 그들의 높은 탐험정신인 이 기록물을 내 자투리 책꽂이에 고이 꽂아두련다.

또 다른 친구를 기다리며.

 

내게 이런 예쁜 자투리 공간이 생긴다면...

 

읽은 날  2012. 1. 10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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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살아있는 교육 2
이오덕 지음 / 보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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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이오덕>

 

이제는 한 줄의 아름다운 문장이 거저 나오지 않음을 안다. 애정 가득한 시선과 사색이 쌓여야

향기 가득 머금은 꽃봉오리가 터지듯, 단단하기만 한 열매에 단내가 스미듯 나옴을 안다.

작가의 시간이 농축된 문장을 발견하는 묘미와 감흥, 여운, 모두 감탄의 시간이다.

 

제멋대로 뻗친 이름 모를 풀잎 속, 꽃 한송이 오도카니 피어있다. 예전같으면 눈에 띄지도 않던

작은 프레임, 작은 발견이 기쁘다.

기쁨의 연속을 그리워해 보지만, 현실의 핑계 속에 숨는다.

자녀 없이 가는 호젓한 여행, 아직은 멀다.

가족 자전거 길, 스모그가 잔뜩 낀 한강이라도 그저 바라보고 싶지만, 아이들이 재촉한다.

 

책을 읽는다. 흔들리는 버스 안, 아이들이 잠자는 시간 책을 읽는다.

밑줄 근다. 감탄의 문장, 몰랐던 내용, 책 흐름에 필요함 문장에 밑줄 근다.

계속되는 문장과 계속되는 현실, 지친다.

문장은 문장일 뿐이지 않은가.

감탄스러운 문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너무 관념적이지 않은가.

책 속에 들어가 있지만, 나는 현실에 있다. 삶은 현실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돌아오는 답이 없다.

 

독서, 글쓰기...나만의 글쓰기 목표가 무엇일까.

그건 자녀와의 소통이 시작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 나와의 간격이 넓어지면, 이 글들이 튼튼한 다리가 되어 주리라 믿었고,

지금은 조금씩 곁가지가 자라고 있다.

 

이 책 <글쓰기는 어떻게 가르칠까>를 읽을 당시, 내가 원하는 아이들의 글쓰기 목표가 무엇이었

을까. 아마 아이들이 글을 잘 썼으면 하는 바램과 현실적인 학업 향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그리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글쓰기의 본질적

인 목표를 얘기하고 있어서였다.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곧,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글은 쓸거리를 찾고 정하는 단계에서, 실제로 글을 쓰면서, 쓴 것을 고

치고 비판하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삶과 생각을 키워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소박하고 솔직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할까?  풍부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할까?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게 할까?   사람다운 행동을 하게 할까?  창조하는 태도를 가지

게 할까?  이런 것이 목표가 된다.  참된 사람, 민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르는 에 글쓰기

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이 말하는 글쓰기의 본질적인 목표에 이어 방법 또한 현실과 멀어 마음에 와닿지

않았나 보다.

 

"어린이는 철학이고 종교고 무슨 주의고 사상이고 다 모르지만, 어른들이 오랜 세월 애써 겨우

깨닫게 된 진리를 아주 단순하게 직감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어린이는 숙제와 시험

공부에 매달려 있는 어린이가 아니고, 자연 속에서 뛰놀면서 살아가는 어린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도시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 대체로 재미가 없다. 날마다 하는 일이 똑같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언제나 짜여진 일과를 되풀이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임자가 되어 그날 그날 할

것을 계획하고, 그 계획한 것을 실행하는 동안에 실패하기도 하고 잘 되기도 하는 괴로움과

기쁨을 맛보고, 실패하면 다시 또 궁리를 해서 잘하려고 애쓰는 생활, 곧 이러한 자기의 삶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삶을 빼앗겨 버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박차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

다. 머리는 하늘에 있지만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기 때문에, 이 책이 그리 와닿지

않았나 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시 꺼내어 본 건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오던 선생이 말하는 글쓰기의 본질이 현실 속 내게 울림이 된다.

 

아름다운 문장이 현실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감탄스런 문장이 지금 당장 변화를 주지 않아도, 서서히 물들어가는 변화 또한 있는 것이다.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 돌멩이 하나가 호수에 떨어져 생기는 작은 동심원, 그 동심원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소리없이 조용하게, 주의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게, 그렇게.

 

글쓰기를 통해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자. 삶을 가꾸어가자.

"훌륭한 시를 쓴다는 것은 훌륭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라 한다. '훌륭'의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아보자. 스스로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면 그것이 진정 '휼륭'의 기준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쓸 것이다.

 

 

읽은 날  2009. 7. 4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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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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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누군가가 읽어 온 책 이력은 그 사람의 성향, 취향, 이력까지 말해줄지 모른다. 그때 그때 관심사

이동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동안 분야별 쌓인 책의 두께가 그를 대변해주지 않을까......

관심의 두께, 관심의 이동은 때로는 그의 욕망이며 때로는 결핍, 때로는 희망일 수 있다.

 

'나'를 구분지어 본다.

내가 아는 '나'와 사회적인 '나'로.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를 더 추가해야겠다. 블로거인 '나'로.

블로그의 '나'는 보여지고 싶은 부분, 말하고 싶은 부분으로 구성되 있다.

내가 아는 '나'는 순전히 주관적인 부분이고, 사회적인 '나'는 객관적인 부분인데 반해 블로거인

'나'는 주관과 객관이 묘하게 섞여 있다.

 

블로그가 블로거의 주체를 온전히 드러내진 않지만, 여러 블로그마다 분위기와 느낌은 블로거에

따라 절대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내 블로그에 대해 다른 분들이 가지는 느낌은 어떨까.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이 출간되고 한참 후에 읽었다.

읽지 않아도 읽은 느낌이 나기도 하고, 읽지 않아도 대충 내용을 알겠고, 그리고 아픈 환부를 마주

쳐야 하는 피곤함 때문이었다.

책 말고도 현실의 답답함은 늘상 접하는 일인데, 이것을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다니, 사실 피곤

한 부분이 있다.

(가끔 생각한다. 내 블로그가 '피곤'일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답답하고 피곤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용철은 경제 민주주의가 지연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언론과 지식인의 무책임함 속에 '용기'

를 낸 자다. 경제라는 물신을 위해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우리네 정서 속에서 '은혜를 저버린

자'로 불릴 수 있고, 본인의 의도가 완전히 왜곡될 수 있음에도 용기를 내어 삼성을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삼성의 문제를 보자.

 

"이건희 씨 일가와 가신들이 국가적, 사회적 기능을 오도하고 있는 문제는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

하고, 그 중 극히 일부를 국가, 사회의 각 분야에 던져주어 부패시킴으로써 공적 기능을 무력화

하고 나머지 비자금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속불변의 부당한 권력체제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외 많은 삼성의 문제를 제기한 김용철과 천주교 사제단의 전종훈 신부, 함세웅 신부 등의 의도

와 다르게 삼성은 차명으로 숨겨뒀던 수조 원대 자금을 공식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됐고, 불법

으로 얼룩진 경영권 승계 문제도 깨끗해졌다.

그들의 의도, 바램과는 너무도 다른 결과를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혼맥으로 촘촘히 얽힌 유력 정치인과 재벌, 언론사주 등 한국을 움직이는 자들의 힘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사돈 사이인 그네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단단한 그물망을 가졌다. 그 그물

망의 이름이 '삼성 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한다지.

 

그네들 말고 우리는 어떤가.

평범한 우리들까지 '마당발', '인맥'을 동경하게 된 원인은 허술한 사회안전망 탓이다. 개인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구조때문인데, 대개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유를 더 들어보면.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었거나, 병이 생겼을 때 누구나 차별 없이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면, 이런 문화가 생겨날 가능성은 적다. 실제로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일수록 인맥 관리에

지나친 힘을 쏟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병역을 회피하고 세금을 탈루하는 나라가 튼튼한 안보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모두 저절로 혼자 성공할 순 없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에는 보이지 않는 사회

간접자본과 보이지 않는 이의 땀방울과 눈물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해서 그들이 일구어낸 부가 온전히 그들의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금도 삼성공화국에 치이고 있는 중소기업의 속앓이, 무노조 경영원칙에 휘둘리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재벌은 각종 특혜 속에서 자란 "너 하나만 잘 자라면 된다"며 키운

응석받이 아들이다.

 

김용철의 양심고백이 삼성공화국을 향한 바위 계란치기 일지라도,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로서

의미가 있다.

지금 당장 무엇이 바뀌지 않더라도, 권력의 비리를 알리는 자들이 늘어단다면 그네들의 그물망이

비리를 덮어버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촘촘한 그물망이라 해도, 그 틈새가 있지 않은가.

 

그 틈새의 힘을 믿는다.

설령 내 블로그가 '피곤'이 될지라도.

 

 

읽은 날  2011. 3. 20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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