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알프레드 랜싱>
앤 페디먼이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자투리 책꽂이'에 대해 얘기한다.
"모든 사람의 서가에는 자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다. 이 책꽂이
에는 나머지 장서와 상관없는 주제들을 가진 이상한 책들이 몇 권 모여있는데, 가만 보면 장서
임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녀의 자투리 책꽂이에는 극지방 탐험에 대한 책이 64권이나 있는데, 그녀는 특히 아문센에게
패한 영국인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한다.
비록 그녀가 애정하는 스콧 대령은 아니지만, 이 책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제목을 본 순간 이
책을 나의 자투리 책꽂이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비교할 수 없는 빈약한 내 자투리 책꽂이를 이 책 두께만큼 채우고 싶었다. 외로이 꽂혀
있는 '건강', '자기계발', '문화/예술' 류 책에게 친구가 생겼다. 물론 분류할 수 없는, 읽지 않은
분야 책들은 언제까지나 간택을 고대할 것이다.
20세기 초, 아문센과 스콧이 경쟁적으로 남극 탐험을 시도하고 있을 당시, 어니스트 H.섀클턴
(1874~1922)은 한발 늦게 진입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가 후발
주자였기에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문센이나 스콧보다 먼저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섀클턴이든, 아문센, 스콧이든 내게는 모두 앞선 시대의 '극지방 탐험가'로 엇비슷하다. 내 눈에
띄인 이 극지방 탐험가 섀클턴은 당분간 아문센이나 스콧을 만나지 못할 거 같다. 자투리 책꽂이
주인은 생각보다 야박하니까.
섀클턴은 스콧과의 첫번째 탐험에서 괴혈병으로 중도하차한 후 두 번째 탐험에서 스콧보다 580
km나 기록갱신을 세우고 전 대원을 무사귀환 시킨다. 당시에 전 대원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섀클턴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영국 국왕으로부터 '경'이라는 칭
호를 받는다.
그 후 섀클턴이 떠난 세 번째 탐험이 이 책의 내용이며, 그는 네 번째 탐험에서 죽는다.
이 책은 '전 대원 무사귀환'을 이룩한 리더로서의 섀클턴 면모에 집중한 책이라 한다.
가령, 팀의 결속을 흐트러뜨리는 문제의 대원을 조기 발견하고 자신의 텐트 멤버로 선정해 밀착
상담했다든지, 다음과 같은 상황이 대표적인데.
"섀클턴은 이미 한달 간의 식량을 확보했으니 그 물개들은 그냥 그곳에 놔두라고 단호하게 지시
했다. 몇몇 대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섀클턴의 이런 불굴의 자신감은 극단적인 낙관주의로 나타났고, 그건 두 개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대원들의 마음 속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그로 하여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356페이지 중간중간 간단히 나오는 그의 리더로서의 활약상은 그저 모호하기만 했다.
대신 극지방 탐험다운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가령.
"하루 이틀도 아닌 수 개월을 해가 없이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
코 알 수가 없다. 만성 심장병으로 죽기도 하고, 어둠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 스트레스를 견디
지 못해 일시적으로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된 사람도 있었다.
할 일도, 할 말도, 볼 것도 없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방수 파카를 말리기 위해 그의 머리통만한 돌멩이 두 개로 눌러 놓았는데 돌멩이도 파카도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없었다."
약한 내 체력으로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뿐이다.
때로는 맨손으로 노를 젓고, 폭풍우 속에서 비와 바닷물에 연신 몸이 적고, 피곤한 몸을 뉘일 슬리
핑백도 빳빳하게 얼은 환경에서 생존해 나간다.
기초적인 생활이 안되니 사람다운 생활은 말해서 뭣하랴. 주문할 때 '축음기용'이란 단어를 빠뜨
려 쓸모없게 된 무용지물 바느질용 바늘 5천개, 30cm 혹은 그보다 더 긴 거대한 붉은 기생충을
박멸할 약을 챙기지 못한 부주의.
이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불확실성'이었을 것이다.
텐트가 쳐진 곳은 얼음, 그것도 바다에 떠 있는 부빙이다. 정착도 아닌, 표류도 아닌 불확실성 속
에서 눈에 보이는 '얼음'이 어떤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육지조차 부빙
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차라리 절망이었다.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 저주이기만 한, 희망을
가지기 힘든 불확실한 생활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나 같은 허약체질은 극지방 탐험 배에 승선할 수도 없지만, 그런 추위와 열악한 환경에서는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탐험을 시작했지만, 그들이 처했던 열악함의 극치는 왠지 내게
먼 나라 일같다. 활자의 조합이 생생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리더로서 섀클턴의 면모도 그렇고.
위대한 탐험의 두근거리는 시작은 활자로 이루어진 흥분해지지 않는 기록물로 내게 남겨졌다.
섀클턴이 직접 썼다면 훨씬 나았을까.
대원들의 일기와 인터뷰를 통해 묘사한 글의 한계일까.
그래도 그들의 높은 탐험정신인 이 기록물을 내 자투리 책꽂이에 고이 꽂아두련다.
또 다른 친구를 기다리며.
내게 이런 예쁜 자투리 공간이 생긴다면...
읽은 날 2012. 1. 10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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