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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ㅣ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제목만 보면 아주 순수의 극치, 자연과 관련됐을거 같았는데
그 예상을 아주 보기좋게 날려버린 김사인 시인의 시집..
이 전 시집인 가만히 좋아하는...도 같은 맥락인가.. 일단 시어를 쓰심에 있어서
상당히 괴팍하다고 느껴졌다.
옮겨 적는 도중에 너무 힘들어서 때려치고 싶을 정도로 힘겨웠다 시들이.
이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건 죽음이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죽은자에 대한 그리움, 죽은자에 대한 비통 등 4부에 걸쳐서 주변 문인이나 혹은 알고 지낸 이웃,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특히 3부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시인의 고통이 시어들을 통해서 나까지 괴롭혀댔으니까...
암튼 이 시집만 놓고 보자면 김사인 시인은 멀리하는걸로...
가만히 좋아하는은 볼거지만. 휴ㅠㅠㅠ
+)
다시 돌아보니 내가 그 격정적인 시들에 너무 치였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밑줄쳐둔 시들을 찾으려 다시 돌아보니 그렇다.
그래도 이 시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 '에이 시브럴' 인것에는 다름이 없다.
너무 내 얘기 같은것...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풍선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둥근 등
귀 너머로 성근 머리칼 몇을 매만져두고 천천히 점방 앞을 천천히 놀이터 시소 옆을 쓰레기통 고양이 곁을 지난다 약간 굽은 등 순한 등 그 등에서는 어린 새도 다치지 않는다 감도 떨어져 터지지 않고 도르르 구른다 남모르게 따뜻한 등 업혀 가만히 자부럽고 싶은 등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품고 세상 쪽으로는 순한 언덕을 내어놓고 천천히 걸어 조금씩 잦아든다 이윽고 둥근 봉분 하나
철 이른 눈도 내려서 가끔 쉬어가는
먹는다는 것
내 안을 허락한다는 것. 너에게 내 몸을 열고 싶다는 것 내 혀와 이빨과 목구멍과 대장과 항문을 열어준다는 것 그렇게 음탕한 생각. 또한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다는 것 지금의 죽음이고 싶은 것 다른 나이고 싶다는 것 사랑을 느낀다는 것. 너를 내 안에 넣고 싶다는 것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 너이고 싶다는 생각 네가 아닌 나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의욕. 너를 먹네 포충식물처럼 끈끈하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활짝 열어 너를 맞네 세포 하나하나까지 너에게 내주네. 그러므로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 모든 구애가 그렇듯이 밥이건 고기건 사람이건 먹는다는 것은 먹힌다는 것 죽음처럼 아찔한 것 길고 황홀한 키스 먹는다는 것은 갖고 싶다는 것 새 자동차를 장화를 장미를 새끼 고양이를 향해 눈이 빛나는 것 같이 있고 싶다는 것 한 몸이 되고 싶다는 것.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랜 식욕의 역사 몸 너머 영혼 속에까지 너를 들이고 싶은 것 네가 되겠다는 것 기어이 먹는다는 것은.
에이 시브럴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땀은 흐르고 배는 고프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은 저물고
바로 이때 나직하게 해보십지 `에이 시브럴--` 양말 벗어 팽개치듯 `에이 시브럴--` 자갈밭 막 굴러온 개털 인생처럼 다소 고독하게 가래침 돋워 입도 개운합지 `에이 시브럴--` 갓댐에 염병에 ㅈ에 ㅆ, 쓸 만한 말들이야 줄을 섰지만 그래도 그중 인간미가 있기로는 나직하게 피리 부는 `에이 시브럴--` (존재의 초월이랄까 무슨 대해방 비슷한 게 거기 좀 있다니깐) 얼토당토않은 `에이 시브럴--`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 크게는 못하고 입안으로 읊조리는 `에이 시브럴--`
꿈
올해엔 말이지,라고 쓰면 그 두마디가 흰 팝콘이 되어 종이에서 튀어오르는 거지. 때죽나무 흰 꽃으로 퐁퐁 피어날 때도 있어. 언제나 돈이 모자란 아내가 돌아앉아 한숨을 쉬면 순간 나는 담모충이로 날아가 시치미를 떼지 중년의 모과나무가 되지 오랫동안 점잚고 향기롭게. 아이들이 지쳐 돌아오면 겨울비 속을 터덕터덕 걸어 나무인 나 평화시장 앞까지 나아가네. 신호대기 붉은 등이 바뀌는 순간 숨죽였던 퀵서비스 오토바이 부대는 갈매기떼가 되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우도나 지도까지의 저 우아한 활강 기분 좋은 날은 대마도 근처까지 스윽 한번 다녀오기도 한다네. 부은 발 어루만지던 노숙자는 갈매기에 놀라 지하도 벽을 쿵 들이받고, 순간 등 검은 신사 고래가 되어 유유히 심해를 미끄러지네 쿠릴열도 돌아 희망봉까지.
올해엔 부디 말이지,라고 적어보네 흰 팝콘이 튀어오를 때까지 갈매기와 고래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이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가을날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서부시장
굴 한 다라이를 서둘러 마저 싸고 깡통 화톳불에 장작을 보탠다. 시래기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며 테레비 쪽을 힐끗 흘긴다. 누가 당선되건 관심도 없다. 화투판 비광만도 못한 것들이 뭐라고 씨부린다.
판은 벌써 어우러졌다. 추취에 붉어진 코끝에 콧물을 달고 곱은 손으로 패를 쥔다. 인생 그까이꺼 좆도 아닌 거, 옜다 똥피다 그래, 니 처무라 아나 고맙데이 복 받을 끼다 겹겹이 쉐타를 껴입고 질펀한 욕지거리에 배가 부르다. 진 일로 뭉그러진 손가락에 담배를 쥐고
세상 같은 것 믿지 않는다. 바랜 머리칼과 눈빛뿐 믿고 자실 것도 더는 없는 일 인생 그까이꺼 연속극만도 못한 거 고등어 속창보다 더 비린 거.
적막에 바침
그대는 강 건너서 잠이 드시고
곤하여 가랑가랑 코도 고시고
나는 나는 창 저편
강물로 스미는 눈송이에나 기대네
무신한 서양 노래나 따라서 흘러가보네
그대 깊은 잠 흔들릴세라
마지막 한잔을 조심히 비우고
목젖 떠는 소리도 조마로워라
강 건너 단잠 속에 그대를 묻고
이만치서 누리는 적적한 평화
이 생각도 저 생각도 나지 않고
먹먹하게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
무릎 꿇다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삼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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