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황석영의 소설을 참 오랫만에 읽었다. 장길산을 읽은 후로는 거의 손을 못댄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광주5.18이후의 소설을 거의 안 읽었다는 뜻이되네... 심하다. 아, 심청을 읽었다. 좀 황당하다는 느낌으로,
요즈음 계속 이런 저런 소설들을 많이 손댔다. 가볍고도 무거운 여러 소설 속에서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단연 압권!
일곱째딸로 태어나 북한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가족을 다 잃고 중국으로 흘러들어와 다시 런던으로 흘러들어가기까지 15세의 소녀가 겪어야 할 운명은 가혹하다. 게다가 오늘날의 문제점을 바리데기를 통해서 살펴보려는 작가의 욕심(?)이 바리데기의 인생을 결코 해피하게 만들지 않는다.
칠공주나 바리공주, 바리데기 등은 황천무가의 무속신의 원조라 할 수 있고 한반도 전 지역에서 구송되어 오면서 47종의 구술자료를 남기고 있다한다. 영혼구제를 위해 저승을 다녀오는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바리가 겪는 고통과 수난을 통해 고통받는 고통의 치유사 또는 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294쪽)로서의 성격이 오랜 생명력의 비밀이라고도 한다. 또한 바리데기는 우리 형식과 서사에 현재의 세계가 마주친 현실을 담아낸 작업이라고... 바리데기는 오늘의 새로운 현상인 '이동'을 주제로 삼고 전쟁과 갈등의 새 세기에 문화와 종교와 민족과 빈부 차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다원적 조화의 가능성을 엿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동' 의 중심선에 늘어서서 이 책을 좋게 본 것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풍요로운 나라의 건너편, 바로 지척에서 굶주림과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죽어간 300여만명의 북한을 출발점으로 삼았기에 가슴 아프게 살펴보았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것도 한 핏줄로 태어난 내 형제들의 아픔을 냉정한 한 마디 말로 단정하며 외면하는 우리 세태를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현실의 아픔과 상처를 영적인 세계를 통해서 치유받을 수 밖에 없다면... 가슴이 무거웠다. 차라리 바리가 중국으로 건너가 발마사지를 배운 것으로 중국사람과 만나 행복하게 산다든지 아님 남쪽으로 내려와 잘 살았다는 결말을 지었다면, 아픔없이 내려놓았을 책이었다. 아무리 고통과 불행은 견딜만한 만큼의 양을 짊어진다지만, 가녀린 바리가 짊어진 고통은 너무 크다. 너무 크다. 죽음의 문턱까지 넘어가면서 가져올 생명수가 한 개인의 고통과 희생으로 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 생명수를 통하여 이 세상은 화해할 수 있을까? 바리데기의 천덕꾸러기 대접이 클수록 바리공주의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것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민중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상대적으로 커지는 것 아닌가?
'북한 난민을 세계화 체제의 그늘로 본다.' '한반도의 분단이 세계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운명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황석영의 말에 동감하면서, 꿈과 현실이 빚어내는 현실의 객관적 진단을 아프게 끌어안다. 노마드의 세계가 던져주는 그늘들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