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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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정단 2기의 새 도서가 도착했다. 유즈키 유코의 <고독한 늑대의 피>. 2018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폭력단 대책법 성립 이전 80년대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폭력단계 경찰과 야쿠자 간 세계를 다룬 정통 하드보일드다. <셜록 홈즈> 시리즈나 매그레 반장이 등장하는 <누런 개> 정도는 읽어본 적 있지만 도덕과는 먼 야쿠자 조직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살인과 상해치사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는 처음이었다. 보통 여성작가는 정통 하드보일드 소설에 약하다는 고약한 편견이 있지만, 작가 유즈키 유코는 이러한 편견에 정공법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여성 작가라는 사전적 지식이 없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무겁고 흡입력 있는 하드보일드 장편이었다.


 소설은 구레하라 동부서 수사2과에 새로 부임한 학사 출신 경찰 히오카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히오카가 배정된 폭력단계 상관 오가미 쇼고는 수사2과 주임이자 폭력단계의 반장으로 화려한 수상경력만큼이나 악명 높은 징계처분 횟수로 유명한 자다. 수많은 폭력단 사건을 해결해 왔고 정보 취득 능력도 뛰어나지만, 폭력단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야쿠자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현행범으로 잡고 협박하거나, 흉기로 야쿠자에게 상처를 입혀 자백을 강요하는 둥 막무가내 수사방식도 히오카 입장에선 도통 이해 불가의 인물이다. 바로 이 독특한 경찰 오가미가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가코무라구미 산하 구레하라 금융의 직원 우에사와가 행방불명되면서 사건 전반이 시작된다. 우에사와의 행방불명에 폭력단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직감한 오가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말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히오카에게 처음 보여줬던 막무가내 수사방식은 조족지혈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오가미에게는 친한 '야쿠자 친구' 둘이 있다. 한 명은 히오카가 부임한 첫 날 바로 술자리에 초대한 오다니구미 조직의 부두목 이치노세 모리타카, 나머지 한 명은 오가미의 동창 다키이구미의 두목 다키이 긴지 속칭 짱긴이다. 오가미는 둘에게서 주로 폭력단의 동향과 새로운 사건사고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를 적재적소에 이용하며, 짱긴에게는 따로 비자금을 받아 수사 자금으로 사용한다. 우에사와 납치 살해 사건뿐만 아니라 야나기다 살해 사건, 가나메 초 발포 사건과 일련의 총격 사건, 요시와라 총격 사건으로 가코무라구미와 오다니구미의 싸움이 지속되자 오가미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더 적법하다고 여겨지는 조직 오다니구미의 편을 들며 편파적으로 총기 사용 실행범 간부를 눈감아주거나 밀고자에게 도망칠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주는 등속 가코무라구미가 와해되도록 힘쓰기도 한다. 이렇듯 오가미는 공감보다는 비난이 앞서는 경찰 캐릭터다. 동시에 제 멋대로 수사를 쥐락펴락하며 도통 두려움도 없고 과거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이기에, 사건이 해결될 거라는 보장만큼은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가미가 히오카에게 늑대 문양이 새겨진 지포 라이터를 주는 장면'에서 불안한 미래를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쉬 넘겼다. 종국에 오가미가 직접 이라코카이의 회장 이라코와 협상을 도모하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바다에서 건진 시신을 확인하고도 믿기 힘들어하는 히오카처럼 나 역시 허탈함과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매 장마다 히오카의 일지가 이번 장의 내용을 넌지시 암시한다. 나는 히오카의 일지가 독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사건을 정리하는 역할만 하는 종류라고 보았다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히오카는 알고보니 감찰의 스파이였고, 오가미의 부정 수사 증거를 포착하여 일지에 적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히오카는 오가미의 죽음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겪은 뒤, 자신의 정체를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와 비자금을 건넨 오가미의 뜻에 따라 오가미의 정신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 정신이 바로 책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고독한 늑대'의 정신이다. 히오카는 오가미의 '고독한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정신적 아들'인 셈이다. (히오카가 오래 전 죽은 오가미의 어린 아들과 '슈이치'라는 같은 한자 같은 이름으로 통한다는 사실이 미리 던져진 떡밥이었다.)


 히오카는 오가미가 남긴 노트를 읽고 경찰들의 추악한 사생활과 추문을 알게 된다. 노트 속에는 히오카에게 스파이 지령을 내린 상관 사가의 이름 또한 '호스티스 낙태 사건'과 더불어 적혀 있었다. 히오카는 상관 사가에게 일지를 건네주기 전에 일지에 적힌 오가미의 부정 수사 증거를 모조리 지우고, 오가미가 그랬듯 상관의 사생활을 협박거리로 삼아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정의란 무엇이며, 진짜 정의에 편에 선 자는 누구인가. 제대로 마련된 폭력단 구속 법률이 없고 과학수사는 채 발전하지 않았으며 주먹구구식 수사가 성행했던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오가미의 수사 방식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가미는 이미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심지어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아키코의 죄를 눈감아주며 시체를 유기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경찰 본부는 겉으로는 평화롭고 도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가미가 부정 수사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가미의 수사에 대해 묵인하며 오가미를 철저히 이용해왔다. 오가미를 내칠 수 없던 이유도 오가미가 경찰 간부들 대부분의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정의 구현에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찰 조직은 오가미를 이용해놓고 그의 죽음 앞에선 등을 돌렸다. 결국, 언제나 민간인의 안전을 생각했고 구레하라의 평화를 위해 싸워온 이는 경찰이라는 거대 조직이 아니라 오가미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오가미를 무작정 손가락질하는 것도 그간 벌어진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품은 정의의 딜레마다.


 소설을 보기 전 동명 영화의 트레일러부터 먼저 봤다. 일본의 유명 배우 야쿠쇼 코지가 오가미 역을, 젊은 대세 배우 마츠자카 토리가 히오카 역을 맡았다. 트레일러를 본 덕분에 캐릭터의 인상이나 특징,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상상하기 쉬웠던 것 같다. 언제 한번 동명의 영화도 보고 싶다.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이 영화로는 어떻게 탄생되었을지 궁금하고, 오가미를 그토록 아끼던 모리타카와 짱긴 그리고 아키코의 캐릭터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을지 궁금하다. 덧붙여, 책 맨 앞장에 있는 '등장인물 관계도'가 독서에 큰 도움을 줬다. 등장하는 인물이 워낙 많고 폭력단의 조직도가 첨예하게 엮어 있어 일본 소설이라기 보단 러시아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만큼 인물 몇몇이 헷갈렸는데 그때마다 등장인물 관계도를 적절히 참고했다. 마지막으로, 작가 유즈키 유코는 한 인터뷰에서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의리 없는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서 전후에 누아르 필름 <의리 없는 전쟁>을 참고하여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거야."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수사에 대한 오가미의 열정 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지지만,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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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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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애초부터 모순된 존재이고, 나 역시 모순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어찌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나.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것보다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나 자신을 정의하겠다. 지금처럼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


 록산 게이가 대중문화에서의 콘텐츠를 비평하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은 <헬프>, <노예12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를 신랄하게 까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소외계층이자 여성, 흑인으로서 그녀가 아프게 짚어낸 장면들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면들이었다. 그녀는 할리우드가 흑인들의 아픈 역사를 채찍에 의해 '벌겋게 벗겨진 등'의 모습으로 전시하고 복수라는 장르를 위시해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면서 철저히 백인들의 시선으로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비평을 보고나니 시각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페미니즘에도 문제가 있고 결함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 사회를 중심을 갖고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페미니즘은 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은 서로 자기 말만 하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도 내 작은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크리스 브라운이 여자 친구를 죽기 전까지 때리고도 고작 집행유예를 받고 2012년 그래미 무대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그 시상식에서 올해의 베스트 R&B 앨범 상을 받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찰리 쉰이 켈리 프레스톤에게 ‘실수로‘ 총을 쏘고, 섹스를 거부한 UCLA 학생의 머리를 때리고, 전 아내 데니스 리처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전 아내 브룩 뮐러에게 칼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영화에 출연시키고 텔레비전 쇼에 출연시켜 돈을 찍어 내게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범죄를 저질러 30년 이상 미국 입국이 금지된 로만 폴라스키에게 아카데미 상을 두 번이나 주었기 때문이다. (13세 소녀에게 술과 약물을 먹여 성관계를 함).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마돈나를 폭행하고도 계속해서 비평가들의 극찬 속에 영화를 찍고 두 번이나 아카데미 상을 받은 숀 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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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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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은 유독 더웠다. 110년 만이라는 역사적인 폭염이라고 했다. 입추도 지났고, 폭염의 기세도 한풀 꺾여 요 며칠은 그나마 더위를 식힐 필요 없이 금세 잠을 취할 만해졌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푹푹 찌던 여름, 내게 시원한 겨울의 풍경과 간접 눈보라 체험을 선사해준 책이 있다. 바로 작정단 2기 도서로 받은 토베 얀손의 <무민의 겨울>이다. <무민의 겨울>은 전 8권으로 이루어진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의 다섯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토베 얀손이 《이브닝 뉴스》에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인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특정 독자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썼다'고 작가 토베 얀손이 말한 바 있는 <무민 연작 소설> 시리즈는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시리즈와 더불어 작가의 대표적인 시리즈 작품으로 꼽힌다. 코믹 스트립에서 보았던 대로 자연재해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자세로 헤쳐나가는 무민 가족과 친구들의 유토피아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무민의 겨울>은 가족과 함께 늘 겨울잠을 자던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는 바람에 처음으로 겨울을 나게 되는 이야기다. 춥고 적막하고 외로워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무민 앞에 아빠의 탈의실에 머무는 투티키, 보이지 않는 뾰족뒤쥐, 벽장 속에서 발견한 트롤 앤시스터, 스키를 타고 나타난 헤물렌, 늑대와 어울리고 싶어하는 개 수르쿠, 추위를 피해 들이닥친 그밖의 손님들까지 새롭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봄을 바라는 무민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해물렌 옆에서 스키를 타느라 바쁜 미이처럼 발랄한 기존 캐릭터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얼음 여왕을 만나거나, 해가 다시 숨어버리거나, 손님들이 무민마마의 잼을 다 먹어버렸을 때만 해도 나 역시 무민과 함께 일을 해결해야된다는 책임감과 앞으로 어떻게 겨울을 나야 할까 하는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무민의 겨울>은 다른 무민 시리즈에 비해 어두운 편이라 죽음의 소재가 다뤄지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 여왕을 보고 죽은 줄 알았던 다람쥐가 살아 있다든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던 해물렌, 살로메, 수르쿠 같은 캐릭터를 결국 하나의 친구 무리로 만들어주는 결말을 보면서 '그럼 그렇지! 따뜻하고 다정한 무민의 세계!'라는 혼잣말을 절로 꺼내게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난생 처음 겪어보는 무민이 어떤 무민도 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들을 하는 장면이다. 이를 테면, 오로라를 보거나 눈보라를 맞거나 스키를 타거나 빙판을 달리는 경험들 말이다. 무민 스스로 눈을 맞으며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하고 말하는 장면,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을 보면서 함께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무민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이 내게도 시원하게 쏟아졌고, 무민을 스쳐가던 바람이 내게도 상쾌하게 불어왔다.


 뒤이어,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겨울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토베 얀손의 묘사에 있다. 별안간 겨울잠에서 깬 무민이 지붕 위로 집밖 무민 골짜기를 보았을 때나('생동감 있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모났던 것은 모두 동글동글해졌다.'), 눈폭풍이 친 후의 숲을 말할 때('나뭇가지는 온통 커다란 눈 모자를 썼다. 게다가 숲은 어느 독특한 제과업자가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생크림 케이크처럼 보였다.), 겨울이 가고 부쩍 봄이 다가왔음을 알릴 때('봄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어') 표현들이 하나같이 참 예뻐서 읽는 순간 머릿속에 몽실몽실 수채화를 그리는 듯했다. 그림이 아닌 활자로 모습을 바꿔도 토베 얀손의 묘사는 참 뛰어났구나 하고 깨달았다. 연작소설 시리즈를 읽기 전까진 알지 못했을 테다.


 책을 읽고 난 뒤 무민 시리즈를 더 알고 싶어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어 덧붙인다. 우선 이 책의 역자 이름을 보자마자 나처럼 그녀가 누군지 바로 기억해내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십 여년 전 '미녀들의 수다'라는 방송에 출연한 적 있는 방송인이자 한국어 홍보대사 '따루 살미넨'으로, 현재는 핀란드 투르쿠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핀란드인이다. 역자 이름을 뒤늦게 발견하고 혼자 참 반갑고 신기했다. 그때 방송에서 따루 살미넨이 한국말을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녀가 번역한 책을 이렇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또 다른 사실은, <무민의 겨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년도 2월 메가박스에서 단독개봉했던 <겨울왕국의 무민>이라는 영화로, 책과 완전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지만 무민이 겨울에 혼자 깨어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각색하여 담았다.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본다면 책속의 겨울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본다면 나처럼 깊이 여운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다른 무민 시리즈에 비해 유독 어두운 분위기로 전개되는 이유에 대한 비하인드다. 무민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제2차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 토베 얀손은 전쟁 때문에 군에 입대한 남동생을 그리워하며, 전쟁으로부터 도피해 평화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무민 골짜기의 세계관을 창조했다. 토베 얀손의 이상향이 그대로 반영된 세계가 바로 낙관적이고도 자유롭고 단순하며 심각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무민 골짜기. 무민 가족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홍수나 눈폭풍 등속의 자연재해는 전쟁의 영향이자 메타포인 셈이다. 개중 <무민의 겨울>은 앞서 말했듯이 토베 얀손이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에 출간된 작품이다. 토베 얀손은 당시 무민 코믹 스트립을 장기간 연재하며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던 데다, 동성 연인 툴리키와 관계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압박감과 툴리키와 연애하면서 느낀 사회적 압박감이 '추운 겨울 홀로 깨어나는 무민'이라는 설정과 무민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립감에 오롯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베 얀손의 연인 툴리키는 <무민의 겨울>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투티키의 모델이기도 하다. '투티키'라는 이름은 연인의 애칭 '투티'에서 따왔고, 성격 또한 그녀를 닮았다고 작가가 밟힌 바 있다. 스스로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모습과 무민의 첫 겨울나기의 든든한 안내자가 되어주는 모습, 겨울에는 사과나무가 아닌 눈이 자란다고 이성적으로 말하는 모습 등속이 토베 얀손이 그려낸 투티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당시 유럽 전반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토베 얀손의 나라 핀란드에서는 동성애 금지법까지 존재했지만, 툴리키는 토베 얀손이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낸 파트너였다. 토베 얀손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흥미롭고 안타깝고 아름답기도 한,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었던 비하인드였다.


 무민 캐릭터를 처음 접하거나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라면, 연작 소설을 읽기 전에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시리즈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나 역시 무민을 인형이나 굿즈로만 알던 시절에 코믹 스트립 1권을 읽었고 왜 사람들이 무민이라는 캐릭터에 열광하는지, 그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현재 달마다 피너츠 시리즈와 함께 한 권씩 찾고 있는 시리즈 작품이다. 무민 시리즈와 작가 토베 얀손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세계관은 네이버 캐스트의 글을 참고할 수도 있다. @moomin_publishers 인스타그램 계정에서도 무민의 짧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역시 참고하시길.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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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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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 이어 봤던 마스다 미리 작가의 수짱 시리즈 대표적인 책 하나. 수짱 시리즈의 정확한 순서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원제 すーちゃん]로 시작해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수짱의 연애> 그리고 수짱의 썸남 쓰치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순으로 이어진다.


 수짱은 속으로 내심 좋아하던 나카다 매니저가 동료 이와이와 결혼한다는 비밀을 듣고, 동료를 미워하는 한편 그녀를 미워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에 빠진다. 그러면서 수짱은 '내가 아닌 나'를 꿈꾸고 있는 건지, 그렇다면 '어떤 나'를 꿈꾸고 있는 건지 종종 성찰한다. 수짱의 일상적인 고민들은 "우선은 목욕을 하자"라는 목욕재계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가, 마지막 장에 와서는 카페 점장이 되기로 결정하며 끝을 맺는다.


 복잡하고 단순하고 속되고 양심적이고 못됐지만 예쁜 미혼 삼십대의 모습. 변화가 아니라 '양면적이고도 새로운 나'를 늘려가는 자신의 모습. 수짱의 많은 혼잣말들은 절로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내 혼잣말과 닮았고, 수짱의 친구 마이코의 직장생활은 안쓰러울 정도로 내 경험들과 닮았다.


 자신을 '패배한 개'라고 표현하던 수짱이 자조도 혐오도 없이 자신을 인정하며 하는 마지막 말이 참 좋다.


‘계속 변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다양한 나를 늘려가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니 뭐랄까 조금,‘
"편해. 말은 그래도, 제멋대로인 알바생도 많고 일은 늘어나도 월급은 조금밖에 오르지 않고 육체적으로는 편하지 않아~"
‘하지만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기분 좋아! 일기도 계속 쓰지 못했지만, 복어도 먹어본 적 없지만 ‘나‘라서 좋아.‘
"나라서 좋다고 할까."
‘나도 나쁘지 않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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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달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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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의 제목은 김지은 그림책 평론가의 말에서 따왔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랑은 가장 외로운 곳에서 시작된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 <안녕>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만날 때 하는 인사, 사랑하는 이를 홀로 두고 헤어질 때 하는 인사 모두를 보여주는 가슴 따뜻한 책이다. 


 책은 한 소파에 앉은 젊은 소시지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소시지는 자신과 꼭 닮은 작은 소시지를 식량으로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소시지는 또 다른 아이 소시지를 낳고 소파는 소시지 두 개로 가득찬다. 아이 소시지는 점차 할아버지가 되고, 처음 소파에 앉아있던 젊은 소시지는 어느새 늙은 엄마가 되어있다. 마치 영화 <업>의 유명한 오프닝을 다시 보는 듯 했다. 책은 어떠한 대사도 없이, 자세한 설명도 없이 소시지 할아버지가 노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게 된 배경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 할아버지처럼 홀로 된 강아지가 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팔려갈 때 혼자만 주인을 찾지 못한 강아지는 할인 상품이자 헐값이 되어갔다. 결국 가게에서 찬밥 신세가 된 강아지는 길가에 버려진다. '혼자'가 된 소시지 할아버지는 이렇게 '혼자'가 된 강아지를 만나게 됐다. 비오는 날,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에게 자신의 우산을 챙겨주다가. 


 혼자 남은 것들을 끌어안고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그림책이자,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를 믿는 연대를 아름답게 그린 그림책이다. 소시지 할아버지와 강아지의 만남 뿐만 아니라, 이후 소시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폭탄 아이'와 '불'을 친구로 만나는 강아지의 모습과 외딴 별 영사 기사와 새로운 삶을 꾸리는 소시지 할아버지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나를 두고 떠나버린 사랑이 너무 보고싶고 그리워도 나는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두고 온 사랑이 너무 안타깝고 걱정되어도 나는 새로운 사랑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안녕>처럼 치유와 힘을 건네받은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강아지가 혹여 자기를 먹을까봐 내내 강아지를 겁내며 우주비행사 옷을 고집하던 소시지 할아버지가 어느순간 강아지를 믿고 강아지를 끌어안는 장면이 참 인상 깊었다. 영사 기사에게 찾아가 "내 개가 보고 싶소."하고 말하던 소시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을 뻔 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폭탄 아이와 불이 소시지 할아버지가 앉던 소파에서 강아지와 놀아주는 장면에선 가슴이 찡했고, 폭탄 아이의 도화선이 꺼졌을 땐 나도 소시지 할아버지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역시 잠든 강아지를 지켜보던 소시지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책을 읽던 나조차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따금씩 <어린 왕자>의 감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감상이 궁금해서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안녕달 작가가 직접 읽은 트레일러가 출판사 채널에 업로드되어 있었다. 해당 영상을 첨부해놓는다. 안녕달 작가의 또 다른 그림책 <수박 수영장>이 시립 도서관의 추천 도서로 더운 여름 내내 공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 역시 추천 도서로 두고두고 회자될 그림책이라고 여겨진다.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우리 강아지에게도 이 책을 읽어주고 싶다.

어느 날, 한 소시지 할아버지가 와서 "내 개가 보고 싶소."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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