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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ㅣ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평점 :
올 여름은 유독 더웠다. 110년 만이라는 역사적인 폭염이라고 했다. 입추도 지났고, 폭염의 기세도 한풀 꺾여 요 며칠은 그나마 더위를 식힐 필요 없이 금세 잠을 취할 만해졌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푹푹 찌던 여름, 내게 시원한 겨울의 풍경과 간접 눈보라 체험을 선사해준 책이 있다. 바로 작정단 2기 도서로 받은 토베 얀손의 <무민의 겨울>이다. <무민의 겨울>은 전 8권으로 이루어진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의 다섯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토베 얀손이 《이브닝 뉴스》에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인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특정 독자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썼다'고 작가 토베 얀손이 말한 바 있는 <무민 연작 소설> 시리즈는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시리즈와 더불어 작가의 대표적인 시리즈 작품으로 꼽힌다. 코믹 스트립에서 보았던 대로 자연재해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자세로 헤쳐나가는 무민 가족과 친구들의 유토피아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무민의 겨울>은 가족과 함께 늘 겨울잠을 자던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는 바람에 처음으로 겨울을 나게 되는 이야기다. 춥고 적막하고 외로워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무민 앞에 아빠의 탈의실에 머무는 투티키, 보이지 않는 뾰족뒤쥐, 벽장 속에서 발견한 트롤 앤시스터, 스키를 타고 나타난 헤물렌, 늑대와 어울리고 싶어하는 개 수르쿠, 추위를 피해 들이닥친 그밖의 손님들까지 새롭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봄을 바라는 무민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해물렌 옆에서 스키를 타느라 바쁜 미이처럼 발랄한 기존 캐릭터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얼음 여왕을 만나거나, 해가 다시 숨어버리거나, 손님들이 무민마마의 잼을 다 먹어버렸을 때만 해도 나 역시 무민과 함께 일을 해결해야된다는 책임감과 앞으로 어떻게 겨울을 나야 할까 하는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무민의 겨울>은 다른 무민 시리즈에 비해 어두운 편이라 죽음의 소재가 다뤄지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 여왕을 보고 죽은 줄 알았던 다람쥐가 살아 있다든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던 해물렌, 살로메, 수르쿠 같은 캐릭터를 결국 하나의 친구 무리로 만들어주는 결말을 보면서 '그럼 그렇지! 따뜻하고 다정한 무민의 세계!'라는 혼잣말을 절로 꺼내게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난생 처음 겪어보는 무민이 어떤 무민도 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들을 하는 장면이다. 이를 테면, 오로라를 보거나 눈보라를 맞거나 스키를 타거나 빙판을 달리는 경험들 말이다. 무민 스스로 눈을 맞으며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하고 말하는 장면,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을 보면서 함께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무민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이 내게도 시원하게 쏟아졌고, 무민을 스쳐가던 바람이 내게도 상쾌하게 불어왔다.
뒤이어,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겨울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토베 얀손의 묘사에 있다. 별안간 겨울잠에서 깬 무민이 지붕 위로 집밖 무민 골짜기를 보았을 때나('생동감 있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모났던 것은 모두 동글동글해졌다.'), 눈폭풍이 친 후의 숲을 말할 때('나뭇가지는 온통 커다란 눈 모자를 썼다. 게다가 숲은 어느 독특한 제과업자가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생크림 케이크처럼 보였다.), 겨울이 가고 부쩍 봄이 다가왔음을 알릴 때('봄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어') 표현들이 하나같이 참 예뻐서 읽는 순간 머릿속에 몽실몽실 수채화를 그리는 듯했다. 그림이 아닌 활자로 모습을 바꿔도 토베 얀손의 묘사는 참 뛰어났구나 하고 깨달았다. 연작소설 시리즈를 읽기 전까진 알지 못했을 테다.
책을 읽고 난 뒤 무민 시리즈를 더 알고 싶어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어 덧붙인다. 우선 이 책의 역자 이름을 보자마자 나처럼 그녀가 누군지 바로 기억해내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십 여년 전 '미녀들의 수다'라는 방송에 출연한 적 있는 방송인이자 한국어 홍보대사 '따루 살미넨'으로, 현재는 핀란드 투르쿠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핀란드인이다. 역자 이름을 뒤늦게 발견하고 혼자 참 반갑고 신기했다. 그때 방송에서 따루 살미넨이 한국말을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녀가 번역한 책을 이렇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또 다른 사실은, <무민의 겨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년도 2월 메가박스에서 단독개봉했던 <겨울왕국의 무민>이라는 영화로, 책과 완전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지만 무민이 겨울에 혼자 깨어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각색하여 담았다.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본다면 책속의 겨울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본다면 나처럼 깊이 여운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다른 무민 시리즈에 비해 유독 어두운 분위기로 전개되는 이유에 대한 비하인드다. 무민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제2차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 토베 얀손은 전쟁 때문에 군에 입대한 남동생을 그리워하며, 전쟁으로부터 도피해 평화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무민 골짜기의 세계관을 창조했다. 토베 얀손의 이상향이 그대로 반영된 세계가 바로 낙관적이고도 자유롭고 단순하며 심각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무민 골짜기. 무민 가족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홍수나 눈폭풍 등속의 자연재해는 전쟁의 영향이자 메타포인 셈이다. 개중 <무민의 겨울>은 앞서 말했듯이 토베 얀손이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에 출간된 작품이다. 토베 얀손은 당시 무민 코믹 스트립을 장기간 연재하며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던 데다, 동성 연인 툴리키와 관계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압박감과 툴리키와 연애하면서 느낀 사회적 압박감이 '추운 겨울 홀로 깨어나는 무민'이라는 설정과 무민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립감에 오롯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베 얀손의 연인 툴리키는 <무민의 겨울>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투티키의 모델이기도 하다. '투티키'라는 이름은 연인의 애칭 '투티'에서 따왔고, 성격 또한 그녀를 닮았다고 작가가 밟힌 바 있다. 스스로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모습과 무민의 첫 겨울나기의 든든한 안내자가 되어주는 모습, 겨울에는 사과나무가 아닌 눈이 자란다고 이성적으로 말하는 모습 등속이 토베 얀손이 그려낸 투티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당시 유럽 전반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토베 얀손의 나라 핀란드에서는 동성애 금지법까지 존재했지만, 툴리키는 토베 얀손이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낸 파트너였다. 토베 얀손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흥미롭고 안타깝고 아름답기도 한,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었던 비하인드였다.
무민 캐릭터를 처음 접하거나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라면, 연작 소설을 읽기 전에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시리즈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나 역시 무민을 인형이나 굿즈로만 알던 시절에 코믹 스트립 1권을 읽었고 왜 사람들이 무민이라는 캐릭터에 열광하는지, 그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현재 달마다 피너츠 시리즈와 함께 한 권씩 찾고 있는 시리즈 작품이다. 무민 시리즈와 작가 토베 얀손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세계관은 네이버 캐스트의 글을 참고할 수도 있다. @moomin_publishers 인스타그램 계정에서도 무민의 짧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역시 참고하시길.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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