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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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정단 2기의 새 도서가 도착했다. 유즈키 유코의 <고독한 늑대의 피>. 2018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폭력단 대책법 성립 이전 80년대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폭력단계 경찰과 야쿠자 간 세계를 다룬 정통 하드보일드다. <셜록 홈즈> 시리즈나 매그레 반장이 등장하는 <누런 개> 정도는 읽어본 적 있지만 도덕과는 먼 야쿠자 조직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살인과 상해치사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는 처음이었다. 보통 여성작가는 정통 하드보일드 소설에 약하다는 고약한 편견이 있지만, 작가 유즈키 유코는 이러한 편견에 정공법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여성 작가라는 사전적 지식이 없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무겁고 흡입력 있는 하드보일드 장편이었다.


 소설은 구레하라 동부서 수사2과에 새로 부임한 학사 출신 경찰 히오카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히오카가 배정된 폭력단계 상관 오가미 쇼고는 수사2과 주임이자 폭력단계의 반장으로 화려한 수상경력만큼이나 악명 높은 징계처분 횟수로 유명한 자다. 수많은 폭력단 사건을 해결해 왔고 정보 취득 능력도 뛰어나지만, 폭력단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야쿠자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현행범으로 잡고 협박하거나, 흉기로 야쿠자에게 상처를 입혀 자백을 강요하는 둥 막무가내 수사방식도 히오카 입장에선 도통 이해 불가의 인물이다. 바로 이 독특한 경찰 오가미가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가코무라구미 산하 구레하라 금융의 직원 우에사와가 행방불명되면서 사건 전반이 시작된다. 우에사와의 행방불명에 폭력단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직감한 오가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말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히오카에게 처음 보여줬던 막무가내 수사방식은 조족지혈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오가미에게는 친한 '야쿠자 친구' 둘이 있다. 한 명은 히오카가 부임한 첫 날 바로 술자리에 초대한 오다니구미 조직의 부두목 이치노세 모리타카, 나머지 한 명은 오가미의 동창 다키이구미의 두목 다키이 긴지 속칭 짱긴이다. 오가미는 둘에게서 주로 폭력단의 동향과 새로운 사건사고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를 적재적소에 이용하며, 짱긴에게는 따로 비자금을 받아 수사 자금으로 사용한다. 우에사와 납치 살해 사건뿐만 아니라 야나기다 살해 사건, 가나메 초 발포 사건과 일련의 총격 사건, 요시와라 총격 사건으로 가코무라구미와 오다니구미의 싸움이 지속되자 오가미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더 적법하다고 여겨지는 조직 오다니구미의 편을 들며 편파적으로 총기 사용 실행범 간부를 눈감아주거나 밀고자에게 도망칠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주는 등속 가코무라구미가 와해되도록 힘쓰기도 한다. 이렇듯 오가미는 공감보다는 비난이 앞서는 경찰 캐릭터다. 동시에 제 멋대로 수사를 쥐락펴락하며 도통 두려움도 없고 과거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이기에, 사건이 해결될 거라는 보장만큼은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가미가 히오카에게 늑대 문양이 새겨진 지포 라이터를 주는 장면'에서 불안한 미래를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쉬 넘겼다. 종국에 오가미가 직접 이라코카이의 회장 이라코와 협상을 도모하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바다에서 건진 시신을 확인하고도 믿기 힘들어하는 히오카처럼 나 역시 허탈함과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매 장마다 히오카의 일지가 이번 장의 내용을 넌지시 암시한다. 나는 히오카의 일지가 독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사건을 정리하는 역할만 하는 종류라고 보았다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히오카는 알고보니 감찰의 스파이였고, 오가미의 부정 수사 증거를 포착하여 일지에 적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히오카는 오가미의 죽음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겪은 뒤, 자신의 정체를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와 비자금을 건넨 오가미의 뜻에 따라 오가미의 정신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 정신이 바로 책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고독한 늑대'의 정신이다. 히오카는 오가미의 '고독한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정신적 아들'인 셈이다. (히오카가 오래 전 죽은 오가미의 어린 아들과 '슈이치'라는 같은 한자 같은 이름으로 통한다는 사실이 미리 던져진 떡밥이었다.)


 히오카는 오가미가 남긴 노트를 읽고 경찰들의 추악한 사생활과 추문을 알게 된다. 노트 속에는 히오카에게 스파이 지령을 내린 상관 사가의 이름 또한 '호스티스 낙태 사건'과 더불어 적혀 있었다. 히오카는 상관 사가에게 일지를 건네주기 전에 일지에 적힌 오가미의 부정 수사 증거를 모조리 지우고, 오가미가 그랬듯 상관의 사생활을 협박거리로 삼아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정의란 무엇이며, 진짜 정의에 편에 선 자는 누구인가. 제대로 마련된 폭력단 구속 법률이 없고 과학수사는 채 발전하지 않았으며 주먹구구식 수사가 성행했던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오가미의 수사 방식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가미는 이미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심지어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아키코의 죄를 눈감아주며 시체를 유기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경찰 본부는 겉으로는 평화롭고 도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가미가 부정 수사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가미의 수사에 대해 묵인하며 오가미를 철저히 이용해왔다. 오가미를 내칠 수 없던 이유도 오가미가 경찰 간부들 대부분의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정의 구현에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찰 조직은 오가미를 이용해놓고 그의 죽음 앞에선 등을 돌렸다. 결국, 언제나 민간인의 안전을 생각했고 구레하라의 평화를 위해 싸워온 이는 경찰이라는 거대 조직이 아니라 오가미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오가미를 무작정 손가락질하는 것도 그간 벌어진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품은 정의의 딜레마다.


 소설을 보기 전 동명 영화의 트레일러부터 먼저 봤다. 일본의 유명 배우 야쿠쇼 코지가 오가미 역을, 젊은 대세 배우 마츠자카 토리가 히오카 역을 맡았다. 트레일러를 본 덕분에 캐릭터의 인상이나 특징,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상상하기 쉬웠던 것 같다. 언제 한번 동명의 영화도 보고 싶다.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이 영화로는 어떻게 탄생되었을지 궁금하고, 오가미를 그토록 아끼던 모리타카와 짱긴 그리고 아키코의 캐릭터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을지 궁금하다. 덧붙여, 책 맨 앞장에 있는 '등장인물 관계도'가 독서에 큰 도움을 줬다. 등장하는 인물이 워낙 많고 폭력단의 조직도가 첨예하게 엮어 있어 일본 소설이라기 보단 러시아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만큼 인물 몇몇이 헷갈렸는데 그때마다 등장인물 관계도를 적절히 참고했다. 마지막으로, 작가 유즈키 유코는 한 인터뷰에서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의리 없는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서 전후에 누아르 필름 <의리 없는 전쟁>을 참고하여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거야."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수사에 대한 오가미의 열정 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지지만,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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