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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우주의 어디엔가는 존재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던 명왕성처럼 인지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깊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또한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다. 밤이 되었을 때도 태양은 존재하듯이 말이다.
4개의 단편으로 구성 된 책 <9월의 4분의 1>은 영겁의 만남 끝에 단 한 번 옷깃을 스친다는 인연처럼 쉽게 지나쳐버리는 추억들을 들춰내어 그 추억이 분명 실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역시 롤링스톤즈, 비틀즈, 레드 제플린, ABBA등의 곡들이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되어서 소설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를 말없이 대변하기도 한다.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편에서의 레드 제플린을 부르는 ‘나오’의 모습은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재현한 여가수 Melanie Safka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닌가 하고 혼자 상상하기도 했다.
오사키 요시오의 소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그러나 우리가 굳이 의식하려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조명한다. 계절을 알리는 공기와 조용한 장소에서의 고요한 대화소리가 내는 느낌 등 현상보다는 분위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는 상당부분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매번 등장하는 작가 또는 편집장의 소재라거나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이력,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비슷한 내면의 표현이라거나 이성적 취향이 그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작가 후기라거나 역자후기가 다뤄지지 않고 있는 만큼, 후기에서 일부 소개되리라 기대했던 비하인드 스토리 따위가 누락된 점은 적잖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소위 '오사키 요시오적인 소재'들은 작가 특유의 감성을 트렌드화 시키는데 한 몫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세 권(파일럿 피쉬, 아디안텀 블루, 9월의 4분의 1)의 책으로 ‘이제 그의 작품은 모두 통달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9월의 4분의 1>에서 소설가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결코 소설을 쓸 수 없었던 ‘겐지’가 미리 설계도를 그려놓고 기능을 정한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듯이 인생이라는 것도 정해진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살다보면 완성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막연했던 두려움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었다.
오사키 요시오. 그는 언제나 ‘상실과 치유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복되는 자아의 충돌과 과거의 회피로 인한 고통을 어린 시절에서부터 청년기, 그리고 더 나이든 후까지 곱씹어보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제 ‘익숙한 집’ 같다. 너무 오래도록 지내서 어느 것도 새로울 것 없을 것 같은 집말이다. 하지만 결코 영원히 완전하게 떠날 수 없고, 다시 찾았을 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집처럼 느껴진다.
지금, 나의 ‘9월 4일 역(驛)’에서의 지나간 약속은 없었는지 되뇌어본다. 지나온 기억들이 그저 과거라는 추억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존재감 없이 뭉개져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제 그것들을 들추어내서 잃어버린 보석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