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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나는 이 책의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를 아주 좋아한다. 그는 내가 유럽소설을 읽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작가이다. 그의 '겨울아이', '콧수염'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으로 이 소설이 나온 것을 알게 되자 곧이어 도서관으로 갔다. 날카로운 칼로 소리없이 심장을 도려내듯이 그의 소설은 조용하지만 어둡고 무섭고 기발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인생 전체가 거짓인 남자. 그 거짓을 진실인양 살아온 남자. 거짓을 숨기고자 했고 완벽한 연기를 하였으나 이것이 탄로나기 시작하면서 혼란의 소용돌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가리고 인생을 통째로 덮어버리려고 했던 남자. 부모와 자식, 부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살아남아 재판받은 장클로드 로망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거야? 어떻게 돌아가는거고 이 인물들은 지금 뭐라고 짓꺼리는 거지?...
누가 죄인인가.
인생이 거짓이었고, 그 거짓을 진짜라고 믿으며 살았던 가족을 몰살하고도 비열한 뉘우침을 보이는 장클로드 로망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가까운 관계임에도 그토록 무심할 수 있고, 넋놓고 있을 수 있었던 그의 친구와 가족들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죄는 밉지만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으나 이내 우스워졌다. 그 말을 적용하기엔 그의 죄가 너무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가 '의도적'으로 가족들을 속이고, 자기 인생을 연극처럼 꾸며넣고, 가족을 몰살하였던가? 그건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었을까.
나의 혼란은 누구를 탓해야하는가, 누가 진정 죄인인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동시에 죄인임에도 갖은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아이러니함에 놀랐다.
나는 범죄를 다룬 기사를 읽을 때 여느 사람들처럼 혀를차며 때로는 범인을 욕하기도 하고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기사들을 볼 때 마다 나는 그들의 인생의 시작과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의 결과는 비록 범죄였으나 그의 인생 전체가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전공과 관련해서 나는 심리학을 배운적이 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장클로드 로망의 유년을 상상해본다.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친 사람은 적어도 납득이 가능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범위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일으킬 수 있는 말썽이나 실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발달과정이 비정상적이라면 그것이 눈에 띄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개개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므로, 그는 그 나름대로의 정신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그 범죄또한 상식밖의 것이 많다. 로망은 어린시절 병색이 짙은 어머니와의 생활에서 감히 삶의 어두운면을 드러내거나 슬픔을 내비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숨기고, 행복한 척, 재미있는 척 또는 억지로 슬픈척을 하는 것이 교육되었던 것이다. 마치 짐승에게 길러진 인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본능을 드러내는 것 처럼 말이다. 로망은 이미 어릴 때 '하얀 거짓말'에 대해 그 자체가 도피처가 될 수 있으며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가 극단적으로 가족을 몰살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수년간의 거짓인생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것은 무관심 속에 길러진 어린아이의 본성의 폭발이 아니었을까.
거짓말 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방어기전도 익힐 수 없었기에 그는 재판하는 동안 감정의 기복을 숨길 수 없으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켰다.
장클로드 로망은 순간순간 나 스스로에게 오버랩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인간이기에 인간 내면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 건드려졌을 때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지는지가 느껴졌다. 인간이란 이토록 약한 존재인 것이다.
저지른 죄의 값은 달게 받아야겠지만 죄를 지은 것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니..... 그래서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였던가.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로망이 가족을 죽인것인지, 스스로를 죽인것인지, 로망의 가족이 그로 하여금 자신들을 죽이도록 한 것인지...(어쩌면 그렇게 남편, 친구, 아들을 모르고 살 수 있을까.)
누군가는 끝까지 올바르게 죄를 뉘우치지 않는 그의 뻔뻔함에 놀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를 용서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사기꾼에 살인자인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다니, 이와 같은 아이러니도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모두 프랑스 현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이 많이 아팠다. 죽은 사람에게도, 죽인 사람에게도, 남은 사람에게도..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만약 뤼크이고 내 베스트 프렌드가 로망이라면,
나는 뤼크처럼 친구의 죄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뒤로 빠질 것인가,
아니면 위의 서평에서의 감상처럼 로망을 이해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