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해피투게더 라는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나와서 알고 있는 시를 한 편씩 암송하는 장면이 나왔다. 알맞은 음색과 발음으로 읊조리는 시는 그들이 방송을 위해 급히 외운 것일지라도 참 예쁘게 들렸다. ‘가을 하늘이 참 예쁘다’고 전한 친구의 말에도 크게 느낄 수 없었던 계절이 시 낭송을 들으니 나도 이번 가을에는 시 한 편 외워둘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날 나는 아주 어릴 때 외웠던 ‘산유화’를 기억해내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 일부러라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자고 다짐한 게 기억이 난다. 너무 바쁜 일상에 남과 다른 생활 리듬 때문에 힘들어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는 채 지냈던 날이 있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싶어 갑작스럽게 우울해졌었다. 책이라도 읽어야겠다며 몇 달 만에 처음 읽은 책이 오히려 그런 감정을 복받치게 해서 어쩔 줄 몰랐던 때. 잘 울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버스 안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너무 젊고 어렸기 때문에 스스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지금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 그 고민은 물리칠 수도 없지만 동시에 쉽게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을 보면서 살자’고 다짐했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온전히 느끼면서 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좁은 집에 화분을 사 들여 놓는다고 핀잔하던 내가 새싹이 돋는 것에 감동하며 매일 베란다의 화분을 들여다보고 산책에 나가면 길가의 풀과 물고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가을을 앓는다. 앓는 것이 있으면 달래는 것도 있을 텐데 영혼을 앓고 있을 때 나를 달래주던 것은 무엇이었나.


 오랜만에 바라본 창밖 풍경이 노란색 천지라서 놀랐다. 달력에 11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던 것도 11월이 한참 지났을 때였다. 계절을 온전히 느끼기로 하고나서 가을이 되면 길마다 세워진 은행나무 잎의 노란색 때문에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노란색 눈을 뒤집어 쓴 듯이 반짝이는 노란 빛의 은행나무가 정말 좋다. 이맘때면 노란색이 좋다는 나에게 울 엄마는 ‘노란색이 좋아지면 애정결핍이래.’라며 놀리곤 하신다. 엄마 말씀 대로라고 해도 반짝이는 노란색을 볼 때마다 어린아이가 되어 행복해하는 동안에는 그 결핍도 아무것이 아니게 되니까 또 좋다.

 시는 어려워서 잘 읽지 않게 된다. 좋아하는 시를 대라고 하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백석의 시를 조금 좋아합니다.’라고 수줍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백석의 시가 전문적으로 어떻게 해석이 되든지 내 마음대로 그의 시를 느끼고 아이처럼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나귀’를 떠올리면 샤갈의 그림과 백석의 시가 동시에 떠올라서 파랑새 동화책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복해진다.


 읽기 쉬운 시가 좋아서 이 책을 골랐다. 앞의 몇 장을 읽었을 때 난해하게 단어를 띄어 놓은 시가 아니라 줄줄 늘어놓은 일기 같은 시라서 읽기 편할 거라 생각했다. 시인의 마음을 공감하고 싶었다. 은행잎의 노란 색과 샤갈의 그림 같은 시를 원했지만 허연의 시는 너무 어두웠다. 그는 10년 만에 시를 썼다고 한다. ‘소년’이었을 스스로를 ‘나쁜 소년’이라 표현하는가하면 다른 시에서도 유독 그는 혼자 있다. 10년 동안 그는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그가 ‘혼자라도 나는 행복해’라고 말했더라면 안심했을 텐데 ‘나는 혼자였고 앞으로도 굳이 여럿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타인과 세상에 눈과 귀를 막아버린 듯해서 가슴이 아팠다.


 시 <서걱거리다>에서도 그는 지하철의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규정하는 입장이다. ‘세상은 시보다 허술하다,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그가 가여웠다. 세상에 대해 미리 짐작하면 고립되는 일 뿐이다. 어린아이가 늘 행복한 것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세상의 좋은 점을 먼저 본다. 무엇이든 어둡다고 단정 짓는 순간 외롭고 괴롭다.


 그가 세상 혹은 스스로의 어두움(?)을 해소하고 있는 중인지 아직 확신이 없다. 시인이라고 혼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글만 쓴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뱉어낸 독백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