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그는 그녀가 없을 때면 여전히 그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마치고 와서 방으로 들어오면 만족감도, 기쁨도 사라져 버렸다. 막상 그녀가 앞에 있으면 그는 그녀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렸다. 번번이 마찬가지 실망감이, 유감이 고개를 들 뿐이었다. 그는 하루 내내 그녀와의 약속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녀와는 다른 어떤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118쪽

 

 요즘 세상에 누가 '신분을 뛰어 넘은 사랑'을 그린 드라마를 신선하다 할까. 종속적인 여주인공과 가부장적이고 힘에 넘치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도 식상하게 된지 오래다. 멀지 않은 옛날, 드라마에서 터부taboo시 되었던 남녀의 연애(아니면 단순한 관계일지라도)라는 소재 중 많은 부분은 '여성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변해가고 있다. 좀 더 적극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하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 옛날 마초를 대표하던 남자 주인공이 꽃미남에 모성애를 자극하는 야들야들한 '그'로 바뀐지도 오래다. 

 

 영화 '싸움'에서는 지독히도 싸우는 한 커플이 등장한다. 이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사랑으로 시작해서 이별 직전까지 우리들은 무수히 크고 작은 일 때문에 싸운다. (그렇게 싸우는 것 조차도 묘한 연애의 존재감 같은걸 느끼기도?) 사랑해서 연애하는 두 사람, 왜 싸우는가 물어보면 '너와 내가 다르니까'라고 말한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와 그녀는 온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레이스 뜨는 여자>의 뽐므의 가족은 엄마 하나 뿐이다. 어려서 그녀의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젊었던 엄마는 식당에서 하녀로 일하게 되는데 가난하고 수동적인 편이었던 엄마는 손님이 은밀히 부르면 '네 뜻대로 할게요'라고 대답할 뿐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엄마와 함께 지내서일까, 그녀 또한 좀처럼 속내를 표현하는 일이 적고 분노하는 일도 없으며 누가 하자는대로 따라갈 뿐인 수동적인 아가씨로 성장한다. 미용실 일을 하면서 사귄 친구 마릴렌과 바다로 놀러갔다가 우연히 에므리라는 대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일단 첫눈에 반하고 에므리와 동거하게 된다. 뽐므의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성격, 타고났거나 보고 자랐을 '일꾼, 살림의 왕, 시녀'로서의 솔선수범 함 등은 에므리를 답답하게 한다. 에므리는 귀족 출신으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그들은 공유 할 것이 별로 없었다. 연애의 막바지에서 에므리는 은근하게 답답함과 짜증을 표현하지만 뽐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일도 없는 듯 생활한다. 그런 그녀를 볼때마다 에므리는 반쯤 죄책감을 느끼고 반쯤은 진저리를 치게 된다.

 

 건조하게 헤어지자는 에므리의 말에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하자는 대로 할게요' 라며 짐을 싸서 떠난다. 에므리는 마지막까지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뽐므의 모습에 질려버린다. 그리고는 '남자라면 저런 평범한 여자에게 일생에 몇번쯤은 관심을 두게 마련이고, 훗날 떠올릴 수 있는 그저 그런 추억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뽐므는 에므리에게 '풍속화 가운데 한 폭과 같은 '속옷가지를 맡은 하녀'나 '물 나르는 여인' 또는 '레이스 뜨는 여자''였다. 고전 영화 속에서 하녀와 하룻밤 정사를 나누는 주인나리 처럼 에므리는 뽐므를 '한때 지나가는 바람'으로 생각했고 뽐므에겐 에므리가 '주인나리' 격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외모는 너무 평범했고, 그녀가 느끼기에 스스로의 몸은 좀 뚱뚱한 편이었다. 실연한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내듯, 이별 후 뽐므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거식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뽐므를 병문안한 에므리의 회상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는 '레이스 뜨는 여자' 그녀를 퍽 사랑했다. 우리는 함께 살았지만, 습관이 달랐고 딱히 시간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다. 서로 자주 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다투지 않았다.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방을 떠났을 뿐이었다. 139쪽

 

 차라리 그들도 '싸움'의 두 주인공처럼 만남의 중간중간 주먹다짐이라도 하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녀를 퍽 사랑했으나 함께 살았을 뿐이라는 에므리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습관이 다른 것을 알았지만 맞춰보려 하지 않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도 노력하지 않았던 두사람. 책을 읽으면서 단번에 감정이 정리되지 않음을 느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고, 일부 이해도 하며 먹먹함을 느꼈다.

 

스틸이미지

 

 이 책은 1975년 공쿠르 상을 수상하고 1976년 영화화 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특별전 형식으로 영화를 상영했는데 나는 기회를 놓쳐서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스틸컷으로 실린 뽐므의 모습만은 기억하는데 왜 그녀가 회자되는지 알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얼마 전에 본 '팡팡'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는데, 프랑스 영화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감성적인 면이 많이 닮아있는듯하다.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그랬지만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 중에는 생각보다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많이 있다. 신파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감정 묘사를 어떻게 하느냐, 심리적으로 잘 파고들었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으면 마음이 물결치는 듯 함을 느낀다.

 

 150 페이지의 얇지만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할 책이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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