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플라스틱 피플
파브리스 카로 지음, 강현주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자네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축구시합, 친구들과의 식사모임을 위해서 두세 명 정도의 단역배우가 필요한 적이 없었나? 그럼 돈만 내면 돼. 피귀렉,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파견회사야. -51

 사회 시간이었나, 학교에 가면 '역할'과 '지위'에 대한 내용을 배웠었다. 사람마다 지니는 역할은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를테면 A라는 사람은 어떤 남자의 연인이며, 학생, 딸, 언니, 누나, 동생의 여러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상황에 맡는 역할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는데 당시에 나는 역할 행동을 잘 할수록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 답게, 아빠는 아빠답게. 단순 텍스트였던 '역할'에 대한 정의를 공부하고 본 시험보다 실제 삶에서의 진짜 '역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소설 [플라스틱 피플]은 제목만 보아도 대강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몇겹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낯짝 두꺼운 사람들의 세계. 플라스틱 피플이 사는 세상은 왠지 가식이 물결칠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플라스틱을 지금 나도 두껍게 덧씌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섬뜩하지 않은가? 나는 늘 비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TV나 로봇을 보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았던 것 같다. '저건 남의 얘기야.'라고 강건너 불보듯 했던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연극대본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백수'인 싱글이다. 그의 일상은 매일이 따분하고 대부분의 장기 백수가 그렇듯 무기력이 지나쳐서 좀비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백수니까 동료도 없다. 그에게는 오직 가족 뿐인데 잘생기고 능력있고 유머러스한 동생의 후광에 가려서 그 안에서도 내내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늘 노처녀에게 시집 언제 가냐고 닥달하는 드라마만 봐서 그런지 백수에 인생 참 지루한 노총각의 일상을 보는 것도 신선하다. 신문에 올라온 장례식 부고를 보고 집들이에 가듯 들르던 주인공은 장례식마다 몇번쯤 마주친 남자를 기억해낸다. 그 남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급기야 그 남자는 주인공에게 다가와 '너 피귀렉이냐?'라는 알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고 간다.      

*프랑스어로 단역배우는 '피귀랑(figurant)' 또는 '피귀라시옹(figuration)'이다. '피귀렉(figurec)'이란 명칭은 이에 착안하여 만든 조어이다. 

 얼마전 결혼한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의 하객이 너무 적어서 신랑쪽 하객이 신부 뒤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서 내가 결혼할 때는 어떨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촐한 결혼식을 한다는 외국인들이 부러웠다. 내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내가 찍어낼 청첩장과 부페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얼마나 비례할지 궁금해졌다. 어떤 기사에서는 '가짜 신랑, 신부의 친구 역할을 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현대인은 늘 '바쁘고' 가족은 계속 '줄고'있다. 정말 축의금의 대부분을 하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데 써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피귀렉은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은 아니다. 이미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소설은 한걸음 물러서서 '허구'라고 단정하고 읽기 때문에 피귀렉이 낯설게 느껴질 뿐, 기사에 나온 '가짜 하객'도 이미 피귀렉이 아닌가. 

 소설의 분위기가 독특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는데 이 낯설지 않음은 영화 '트루먼 쇼'때문이었다.(역자후기에서 언급해주어서 상기함.) 역자가 말한대로 트루먼쇼와 플라스틱 피플의 결말은 조금 다르다.(줄거리도 다르고.) 가짜 인생에서 진짜 인생으로 도망치려하던 트루먼이 '과거'가 되고, 진짜 인생에 쩔어서 가짜 인생을 동경하며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게 된 소설의 주인공이 '현재'가 되어버린 것은 섬뜩하다. 오늘 인터넷 뉴스에는 가상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 빠진 남편에게 억장이 무너졌다는 현실의 아내의 사연이 나왔다.

 [(기사)남편이 사이버 부인을 두고 이중 결혼생활을 한다면?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01&article_id=0001723193&section_id=104&section_id2=235&menu_id=104]

우리는 이미 진짜 보다는 가짜에 환호하고 있는 것일까. 환호로 모자라서 아예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할정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소설의 책 표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린다.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그려낸듯한 건조하고 정이 없는 그림. 재미있게도 그의 그림이 '초현실주의'라니 소설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사는 것은 연극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극이 실제 삶보다 더 현실적이고 활기차다는 생각. 그렇기에 우리는 박진감 넘치는 진짜 삶을 뒤로하고 무대 앞 객석으로 모여드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연극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있다. 외줄타기 처럼 현실과 연극(가짜)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낭떨어지로 추락하고 만다. 현실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완벽한 사람은 될수 없다. 여러가지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 우리들은 모두 플라스틱 피플, 피귀렉이다. 가끔 소설의 주인공 처럼 역할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플라스틱 피플들.

유일한 처방은 현실 뿐이야 -125p

 역시 프랑스 소설이다.(매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독) 단순한 스토리지만 생각할꺼리도 많고 무엇보다 매우 재미있다. 만화가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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