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 지음, 이정환 옮김 / 에이지21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진창현.나는 그 이름 석자를 두해전에 알게 되었다. 일본의 배우를 알게된 이후 그가 출연한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보게 되었고 그중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데다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초난강이 나온다고 했다. 이야기는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를 지내고 한국전쟁 이후까지 일본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을지 상상해보았다. 힘 없는 나라의 노예 취급을 받던 조선인은 얼마전까지 주인 행세를 하던 일본에 가서 흔한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진창현이라는 이름 석자를 우뚝 세웠다.

자서전으로 다시 만난 진창현 선생은 두해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그의 사진에서보다 더 늙으셨다. 그러나 표정과 눈빛은 여전히 반짝 빛나고 있었다. 책을 펴자마자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에 대한 관심과 부러움, 존경, 호기심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이라는 두글자는 출신지의 의미 이상을 가진다. 그곳은 그 사람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형제, 자매와도 같다. 어린아이들은 그 시절의 알맹이만 뽑아내어 몽땅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가 살아가는 한 평생의 희망이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나라든지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전쟁으로 대표되는 국가와 백성의 아픔을 조선은 참으로 다양하게 겪었다. 식민지, 나라를 잃은 설움, 살아있다는 것은 옵션일 뿐이었고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았던 시절. 당시의 조선인은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었고, 전쟁에 끌려가 병신이 되거나 죽거나 하고,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었으며 시체를 집 앞 쓰레기 처럼 치우곤 했다. 진창현 선생이 어릴적 마을 사람들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도 느낄 틈이 없이 살았고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배가 불러야 기쁨과 슬픔도 느낄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당시의 조선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비참했을 것이다. 식민지의 백성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발로 차면 그냥 맞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웃도 버려야했을 것이다. 사는 것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거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진창현 선생은 태어나서 부터 몸이 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몸으로 싸우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고 머리를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힘이 있고 남과 싸워 이기는자만이 권력을 쥘 수 있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늘 그를 염려하거나 남자다운 포부를 가지라고 다그쳤다. 그는 어릴때부터 감정이 풍부했던 것 같다. 여느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뛰어노는 것 보다 무엇을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다니는 약장수의 어설픈 연주를 듣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선생에게 바이올린을 배운다. 이후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여러가지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 대학까지 졸업하게 된다. 대학 3학년 때 비로소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진창현. 그리고 20대를 막노동, 린타쿠 운전, 파친코 점원, 고철장수를 하는 등 혹독한 일에 매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나이 서른을 넘길 때 나는 '하아-'하고 놀란 숨을 쉬며 잠시 책을 덮었다. 악기 제작자가 꿈이라면 그에게는 손이 무엇보다도 귀한 재산이다. 그리고 20대는 그에게 있어서 바이올린 제작을 배울 수 있을 때가 아닌가. 내가 만약 그였다면 서른이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꿈을 접었을 것이다. 나는 한참동안 책을 덮은채로 '너무 늦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이미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성공한 그의 이야기는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놀랍고 놀라웠다. 그는 늘 바이올린을 생각했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몸을 가만히 두는 일이 없었고 늘 부산하게 일을 했다. 그에게 떨어진 수많은 행운들도 그가 노력한 결과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성공기는 믿기지 않을만큼 경이롭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에 가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핍박을 감수했어야 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당당했고 포기할줄 몰랐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바이올린 제작하는 일을 맡기지 않겠다는 말도 들었고, 조선인이기에 공장에 취직을 할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도 조선인이기에 늘 고난이 따라다녔고, 그렇기에 새로 마주쳐야하는 역경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노력한다고 해서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될수는 없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바이올린을 만들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의 바이올린을 사는 고객이 생겼고, 그 가격도 계속 올라갔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도 만나고 그의 바이올린을 개인전에 전시하게 되었다.

어릴적 일본으로 건너와 늘 혼자였던 그의 곁에는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가 생겼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늘 신경써주는 좋은 아들이고 오빠이기도 했다. 그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놀라운 투지와 끈기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책으로 만난 그의 일생은 활자로만 보아도 놀라울 정도이다. 마치 고장나지 않는 기계가 다른 기계의 몇배로 일을 해내듯이 그는 평생 몇 사람 몫의 노력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나는 인물서를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진창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무언가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가 한국인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고 뼈저리게 노력했는지 더욱 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고, 배우려고 하면 학교에도 다닐 수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지도에서 어디 쯤 와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나는 되도록 산과 나무로 뒤덮힌 곳에 서 있었으면 좋겠다. 나무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고 길이 험해 구르기도 하고, 밤이 되면 두려움에 떨게 되는 깊은 산 속에 서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못하면 어쩌지'라는 약한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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