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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
로저 하우스덴 지음, 정경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아마 시를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겁니다. 내가 시를 읽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수많은 월간 문학지 중에서도 유독 시를 다루는 책은 많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집에는 작년 가을부터 '시문학'을 구독합니다. 그 책을 나는 전혀 읽지 않는편이지만 우리집에는 시를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라고 하면 입시를 준비할 때 배웠던 교과서 안의 시가 대부분이네요. 어쩌면 '시는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교과서 속의 시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종종 그런 시를 읽다가도 감동을 받곤했던 기억이 나는것을 보면 내가 시를 영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늘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답니다. 왜 시를 읽는지요, 그 시를 읽으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지은이가 뭘 말하는 것인지 이해해요?
시에 대해서 '이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많은데 '이건 어떤 느낌이지요?'라고 묻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어요. 아, 시는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느끼면 되는것인데...... 이번에도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첫만남에서 눈빛만 보고도 맘에 들어버린 사람과도 같네요. '10편의 시를 자기계발과 어울리게 풀어놓은 책'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중에 나는 자기계발이라는 말 대신 그냥 '잠언집'이나 '명상을 위한 책'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었습니다. 책이 시와 함께 구성되어있어서도 그렇고, 요즘 유행하는 많은 자기계발서들 처럼 강력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것으로 충분하거나 혹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은 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본문 첫 장에 메리 올리버의 '여행'이라는 시가 보입니다. 읽어드릴게요 ^^
어느 날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고
마침내 그것을 시작했다
주변의 목소리는
불길한 충고를 하고
온 집안이 들썩이고
오랜 습관이 발목을 잡았지만
목소리들이 저마다
인생을 책임지라고 소리쳤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주춧돌을 흔들고
그들의 슬픔은 너무나 깊었지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때늦은 스산한 밤
부러진 가지와 돌멩이가
길 위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구름이 걷혀 별이 빛날 무렵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하고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세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걸어가며
당신은 천천히 깨달았다
늘 곁에 있던 그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것이었음을
(page 8)
책을 지은 로저 하우스덴은 인생에 있어서 우연한 인연을 만납니다. 그는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우연한 만남, 사건들을 경험합니다. 그 우연은 거짓말 같아서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를 읽는 것도 꼭 같은 것이 아닐까요. 산문처럼 죽 풀어놓은 글을 읽을때와는 달리 소설 책 한권에서 여러 단어를 솎아서 나열한 것 처럼 아리송한 시는 '공감'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그 뜻과 느낌을 파악하기가 쉬워집니다.
첫인상이 좋았던 이 책은 첫 장의 시 또한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어느 날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고 마침내 그것을 시작했다..시의 첫 문장을 읽고 내 안에서 둥둥둥 하고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새로운 것을 시작한 나에게 전해진 메시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속도있게 읽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었습니다. 10편의 시로 나뉘어져있으니 하루에 한편씩 읽기로 했습니다. 매일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다고 들어서 이 책을 명상하는 용도로 사용해보았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시는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생각이 필요한 것이기에 내가 읽은 열편의 시가 모두 감동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건 내가 아직 서른이 안되서일까요^^
시는 '사람'과도 같아요. 사람은 곧 인연이라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만났을 때 번쩍하는 순간이 분명 있지요. 사람에게서 우정, 사랑, 기쁨, 연민 등의 감동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에서도 그런것들을 발견하는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백석'의 시였는데 어렵다는 그의 시는 그것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이전에 읽는 순간 '느낌'이 오는 그런 시였어요.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시는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 읽은 무미건조한 시가 오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기에 담긴 10편의 시는 문학상이라거나 출판사 등단 등의 딱딱해보이는 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편하게 읽어왔던 '잠언'에 가까운 것이라 자연히 읽기도 쉬웠어요.
시를 한편 읽어준 후 작가는 그 시에 관한 에피소드와 인생의 조언, 시구에 대한 느낌 등을 이야기 해줍니다. 이것 또한 여느 자기계발서 처럼 '이렇게 하라'거나 '남들은 이렇게 산다', '멋있게 살자'는 강압적 조언이 아니라 자기고백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작가는 시를 읽고 공감했던 인생의 순간을 이야기 하면서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에 관한 약간의 지식도 알려줍니다. 나는 마치 시로 쓴 편지를 받은 느낌으로 하루에 1편씩의 시와 글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 나를 조급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해봐야지'하고는 얼마안가서 '나는 왜 또 안되는걸까'라며 좌절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서 참 다행입니다. 나는 몹시 느린 사람이거든요. 나는 이 책이 잔잔하게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작은 것에 감동하게 만들어주어서 좋았습니다. 시와 글 모두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어서 고마웠고요. 하지만 자신의 현재를 조금 더 다이나믹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조언자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21세기북스 얼리 리뷰어로 선정되어 미리 원고를 읽고 올린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