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들리에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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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빛나는 이야기

 

  순서
  - 고드름
  - 그녀
  - 미진이
  - 아는 사람
  - 만두
  - 파란 아이
  - 이어폰

 

문학이 아니라 굳이 청소년 문학인 이유는 무엇일까?
꽤 많은 책을 읽어 왔지만 아직까지 그 구분에 대해선 의문이다.
청소년이 등장해서 청소년 문학? 성장소설이기에 청소년 문학?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문학이라서 청소년 문학일까?

그 어떤 기준을 가져다 써도 청소년문학만의 특징이 없다.
청소년 문학은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한 걸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당장 생각나는 이 두 작품 역시 청소년이 등장하고 성장소설임과 동시에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선정되는데 청소년문학이라 하진 않는다. 생각해보면 더 많은 작품들이 있겠지...

김려령의 소설은 출간 당시에는 청소년문학이란 꼬리표를 떼고 나오지만 어느덧 청소년문학이란 꼬리표가 달려 있다. 굳이 청소년 문학이어야 할까?

<샹들리에>역시 그렇다.
청소년이 읽으면 좋겠지만 일곱 빛을 내는 이야기는 청소년보단 사회에서 어른이라 규정하고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읽어야 하는 문학이다.
나이를 먹어 어른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
수능과 취업 경쟁으로 취업 후엔 진급과 장기 경쟁
경쟁의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만 하며 살아온 20살이 넘어 어른이라 취급되는 많은 사람들...
미쳐 마음이 성장하지 못 한 채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이 꼭 읽고 깊이 생각해봐야 될 그런 이야기다.

첫 번째 단편 <고드름>
등장인물의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실험적 작품이다.
주변에 흔히 보는 학생, PC방에서 실없이 떠들던 이야기는 살인 모의가 된다.
쓰러진 사람을 구했다는 뿌듯함은 순간일 뿐 느닷없이 가해자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상황.
어른들은 실없는 이야기에 "왜"라는 질문으로 의미를 담으려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인다.
어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지 못한 채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

두 번째 단편 <그녀>
이야기 속 사건은 분리가 된다.
배경은 장례식이지만 주인공에게 장례식은 생각하기 싫은 '그녀'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싸움을 거는 '그녀'생각만 하다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그녀'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미진이>의 주인공이 된다.
이번 이야기 역시 아이들의 세상에서 바라보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이 보인다.
동네 사람들이 전부 가족보다 더 참견하는 상황.

불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은 보기 드문 마을 이야기...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세대갈등 문제.
같은 시간대에 사는 사람이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다른 시대다.
요즘 어른들은 그들이 살았던 어린 시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 했다.
요즘 아이들은 그들이 살아본 적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이 그때는 아닌데 왜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걸까?

갈등은 마음이 성장하지 못한 '어른'때문은 아닐까?
시간이란 마법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는 먹는다.
육체는 성장하고 늙어가지만, 마음은 시간이란 마법 속에 어느 한순간에 머물 뿐이다.
그 어긋 남이, 미쳐 준비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어른이되 어른이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못된 아이였을까.
왜 그렇게 됐을까. 참 이상한 그녀를 만났다.

 

세 번째 단편 <미진이>
두 번째 이야기의 "그녀"는 미진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세상에 사는 사람들 만큼 다른 삶이 있다.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상, 평범함은 무엇일까?

'미진이'의 이야기가 그렇다.
평범했다 생각했던 세상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배우는 것.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만큼 다양함이 있다는 것.
'엄마'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고, '친구'라 생각했던 '친구'들은 없다.
모든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 갑작스러움은 커다란 충격이 되어 삶을 뒤흔든다.
느닷없는 교통사고처럼...

삶은 교통사고다.
타인이, 또는 아는 사람이 나와 충돌해서 일어나는 교통사고
충돌의 흔적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어 남는다.
사고의 흔적이 희미해지면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 버리는 교통사고.

끝없는 충돌이 '나'를 마구 찌그러트린다.
찌그러짐 속에서 '나'라는 형체는 수 없이 바뀐다.
찌그러진 차를 수리하듯 '나'를 수리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불가능하다.

'삶'이란 녀석은 그런 교통사고지만 멈춤 없이 굴러간다.

내 미래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꾸는 꿈은 있다.

네 번째 단편 <아는 사람>
믿지 못할 세상이 문제일까? 조심 없는 '내'가 문제일까?
과외는 폭력이 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그냥 폭력이 아닌 '성폭력'
성범죄는 '아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는 경각심. 사회의 문제일까? '나'의 문제일까?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변해버린 세상은 누구의 책임일까?
폭력은 폭력일 뿐이라는 것.
두려움에 도망치면 피해자만 늘어난 다는 것.
조금 두렵더라도 폭력에 맞서는 용기가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예방책임을 알려준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철저하게 처벌해야 하는 이야기.

종종 뉴스에서 들려오는 성범죄의 이야기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절절하게 들려오니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이야기가 된다.
'아는 사람' 그 누구나가 잠재적 가해자는 아니지만...
'아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내 몸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별것인 극소수의 매우 특별한 사람들만 가진 권리가 아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생생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권리다.
.
.
.
너는 끝났지? 나는 시작이다.

 

다섯 번째 단편 <만두>
만약이라는 가정, 대신이라는 미안함.
평생 상처가 되어버린 이야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질문. 그리고 우정...
다시 한번 '평범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연 하나쯤 있는 삶이 평범함일까? 특별한 사연 없이 살아가는 것이 평범함 일까?
아! 굳이 평범해야 하나?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들 중 나 역시 특별하지 않다는 것. 아니... 나만의 특별함이 하나쯤은 있다는 것.

'만두'가 품은 것은 저마다의 사연, 저마다의 삶.
모양이 제각각인 만두처럼, 삶 역시 제각각이라는 것.
다양한 만두가 어우러진 만둣국처럼, 삶 또한 어우러짐이라는 것.

이런 만둣국도, 저런 만둣국도, 어우러져야 '맛'난다는 것.
국물이 많기도 하고, 고명이 없기도 한... 그런 만둣국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여섯 번째 단편 <파란 아이>
누구 대신의 삶,
그 누가 죽은 이 라면... 그 삶은 무엇일까?
'나'도 '그'도 아닌 정체 없는 '삶'이란...
'파란 아이'는 '자신'을 찾음으로 '어른'이 된다.

비밀과 비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이해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어긋났던 세상이 맞춰진다.

소년은 한때 '요즘 아이들'이었을 요즘 어른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자신들은 꽤 정숙한 성장기를 보내고 꽤 근사한 어른이 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소년이 보기에는 요즘 어른들이 문제다.

상실의 슬픔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남는다.
이야기 속에서 잠시나마 '세월호'의 남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아이를 잃은 엄마, 친구를 잃은 친구, 엄마를 잃은 아이...
상실은 대체할 수 없는 상실일 뿐이다. 잃은 누군가를 대신한다는 것.
대신할 수 없는 무엇을 대신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이다.

늘... 무언가 하느라 바빴지만,
정작 한 것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일곱 번째 단편 <이어폰>
이어폰으로 두 귀를 막으면 현실과 단절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
'나'만의 세상, '나'만의 세계, 소리를 차단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세상에 있어도, 결코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진 않는다.

'쿵'하는 소리... 그리고 귀찮음...
'나'만의 세상에서 나가기 싫었던 그 순간의 선택이 매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죄책감'...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렇다고 하는 '죄책감'
상실은 지난날의 못해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이라는 가정, '왜'라는 후회...

그동안 부주의라는 말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약간의 실수로 인한 약간의 손실, 그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저 말은
엄마의 죽음과 같은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상처는 아물 수 있을까?

<샹들리에>의 일곱 빛은 '상처'이며, '치유'다.
어른이되 어른아 아닌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빛'이다.
수많은 다양함에서 '나'를 찾는 것.
'내'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어른'아닐까...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빛이 위로와, 용기, 희망으로 감싸 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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