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정이 지난 여름밤이었고, 이 도시 후미진 어느 가파른 계단앞이었다는 것밖에는. 다가가서 손을 잡았던 이는 나였다. 근처에 과일가게가 있었는지 자두를 깨물었을 때나 맡아지는 냄새가 후덥한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나로서는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는 게 작별인사 대신이었다. 그가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든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진주알들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때였다. 그래서 잘가, 라거나 또 만나자, 고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꿰어놓은 줄이 끊어지면 그 줄에 달려 있던 것들이 한순간 후드득 바닥에 쏟아져버리듯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하게 되면 그 뒤로 시효가 지난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와버릴 것 같았다. 나의 자리에 그가 들어와 살았던 지난 시간들, 우리가 서로를 확장시키며 깊어졌던 일들을 그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참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툭 터지면 제어할 길이 없을 거란 생각에 내면은 복잡했지만 얼굴엔 담담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는 팔 년 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이미 타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신경숙-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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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상대는 정해졌고 마지막은 어차피 알 수 없다. 그 불안한 과정을 견디거나 즐기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사실 나도 나의 판단에 확신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선과 가식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한심한 연애를 펼치고 있는 나였지만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의 위선은 알고 있었다. 행복한 연애와 편한 연애를 착각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2. 확신컨대 아마 그 시간 나는 서울에서 제일 구차한 여자였을 것이다. 그저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매달리는 꼴이라니. 그래도 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도 그의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달 수 있었으니. 그 무렵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사랑을 포기하고도 되돌려받을 수 있는 그 밖의 어떤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기억이나 감성, 후각이나 촉각, 뭐 그런 것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데자뷰처럼 기습적으로 나를 찾아올 신비로운 어떤 감각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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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상 속의 당신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 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 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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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 거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 속에 안주해서 살 수도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직하게 척박한 곳이고 인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 사이, 원심분리기같이 광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 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 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 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혹은 헤어져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

 그리고 평생 계속될 것만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희끗한 형체의 유령처럼 등 뒤를 따라다닌 감정의 응어리도 때가 되면 결국 재처럼 부서져 흩어지겠지. 단둘만의 달나라를 보았던 동질성조차 겨우 이 년 혹은 삼 년 정도면 무화되고 타인이 되는 것이다......진짜 상실의 아픔은 그것이다. 평생 계속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이 좀 흐르니, 나도 그렇고, 네 아빠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산 하나처럼 느껴져. 생각해봐. 산 하나의 내부가 품고 잇는 그 많은 생명들과 어찌할 수 없는 인과관계와 진실을. 그게 한 인간이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인 거야. 그러니, 누구도 타인을 구할 만큼 자유로울 수 없어. 제 한 존재를 버티는 일도 참 버거운 거란다."

 

'전경린-엄마의 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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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것은 마치 모서리가 세 개인 뾰족한 삼각형처럼 생겼을 것 같다. 어떤 기억을 떠올리면 그것은 가슴속에서 빙빙 돌기 때문에 모서리에 찔린 마음이 너무 아프다. 계속 떠올릴수록 그것은 바람개비처럼 더 빠르게 빙글빙글 돌아가게 되고 마음은 점점 더 아파진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간 모서리가 다 닳아져서 더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게 될까. 그런 날이 올까. 그런데 나는 내가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모서리에 찔리고 있는 이 아픈 상태가 나를 깨어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나간 일이 비록 오래 전의 것이라고 해도 늘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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