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정이 지난 여름밤이었고, 이 도시 후미진 어느 가파른 계단앞이었다는 것밖에는. 다가가서 손을 잡았던 이는 나였다. 근처에 과일가게가 있었는지 자두를 깨물었을 때나 맡아지는 냄새가 후덥한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나로서는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는 게 작별인사 대신이었다. 그가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든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진주알들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때였다. 그래서 잘가, 라거나 또 만나자, 고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꿰어놓은 줄이 끊어지면 그 줄에 달려 있던 것들이 한순간 후드득 바닥에 쏟아져버리듯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하게 되면 그 뒤로 시효가 지난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와버릴 것 같았다. 나의 자리에 그가 들어와 살았던 지난 시간들, 우리가 서로를 확장시키며 깊어졌던 일들을 그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참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툭 터지면 제어할 길이 없을 거란 생각에 내면은 복잡했지만 얼굴엔 담담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는 팔 년 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이미 타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신경숙-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프롤로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