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명이긴 해도 결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오피스텔과 직장을 오가고, 밤을 새고,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돌아와 빨래를 하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거나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오디오를 바꾸고, 외국으로 현지답사를 떠나고, 돌아오고, 그때끄때 트렌드에 맞는 옷을 구입하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연봉협상에 임하고, 미용실을 바꾸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잠을 자고, 일어나 샤워를 했을 뿐인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었다. 한 해 한 해 미뤘던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마흔살의 독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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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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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볼이 토실해 보여서 한창 연애 중인 줄 알았어."
"그런데 왜 정말 몸무게가 줄지 않는 걸까요? 그 남자를 아무리 평가절하 한다고 해도 상당한 무게일 것 같은데. 참 이상해요."
"그만큼 우울이 쌓였겠지."
"몸무게는 결코 줄지도, 늘지도 않을 거야. 인연에는 무게가 없더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그런 것 따위 없더라. 습관 같은 거더라.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시작하면 무겁게 사랑해야 하고, 거기서 끙끙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참아야 하고."
"누가 참으라고 한 걸까요."
"그러게. 알면 내가 가서 뺨이라도 한 대 날려줄 텐데."

한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어김없이 욕망을 접어야 했을 테고. 그게 온통 슬픔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 중독의 고달픔을 미처 몰랐겠지. 관계의 부작용은 늘 뒤늦게야 나타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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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이전엔 인생은 추억할 만한 영화처럼 느릿느릿, 선명하게 흘러갔다.
세상에 별 보탬도 안 되면서 세상을 두 어깨에 짊어지기라도 한 듯 인상을 쓰고 다니기도 했다. 실체가 이 할이면 환상은 팔 할쯤 되는 연애를 하다 그 환상에게 차여보기도 했다. 환상에게 얻어맞았다고 아픔이 덜한 건 아니었다. 

 봉인을 뜯고, 깊숙이 들어가고, 기어이 달콤한 맛 너머 쓴맛을 보고, 돌아 나오는 길을 잃어버려 헤매는 청춘. 그 무모함에 넌더리를 낸 적도 있으나 이젠 모두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 되었다. 그것들마저 없었더라면 내 젊음이 얼마나 시시했을지 아찔한 걸 보면 난 오래전에 어른이 돼버린 것 같다. 어린 왕자가 한심해하던 '진부한 어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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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처받기 싫고 자기 자신만 지키고 싶다면 사랑하지 않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절절히 사랑해 주길 원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을려고 하면서 상대에게는 눈감고 귀막고 나를 향해 돌진해 주길 바란 것이다. 이걸 20대가 넘은 지금에야 알았다. 나란 인간의 한계다.

 나는 남자에게 한 번도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연인이었다. 그러기엔 항상 내가 더 중요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처럼'이란 시구를 좋아하면서도 나는 정작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나보다 못하다 생각되는 누군가도 받는 저 열렬한 사랑을 왜 나만 받지 못하는가. 사랑을 받으려면 남자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더 잘난 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랑은 잘나서 받는 게 아니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랑해 줄 자리를 만들어두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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