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해부학 - 누구도 말하지 못한 자살 유혹의 역사
포브스 윈슬로 지음, 유지훈 옮김 / 유아이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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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권리인가, 범죄인가?



최근, 서로 모르는 남녀 4명이 안산의 한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끔찍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온라인 등을 통해 만났다는데, 세 명은 경제적인 사정을 비관해서, 한 명은 건강상의 이유로 이런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남의 일이라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상처가 되기 때문이고, 또 그런 행위가 가진 모방성과 전염성 때문입니다. 


그들이 온라인 사이트 등을 통해 만났다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이 그런 끔찍한 선택을 '부추기'는 꼴이며, 모방이 가능하다는 것이 더 큰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도 이를 잘 알고 여러 모로 방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고자 책 제목을 입력했더니, 자동으로 "생명은 소중합니다! 지금, 희망을 클릭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전화상담, 온·오프라인 상담 센터와 연결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 안에 들어 있는 단어를 '살자'로 바꿔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목의 단어가 검색되지 않도록 막아놓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살자'를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내 몸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그게 잘못인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런 선택도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권리일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 책은 이런 물음에 답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영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저술가"입니다. 이 책은 "영미권 최초로 '살자'문제를 종합 분석한 책"이라는 데 가치와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저자가 의학 박사 학위를 딴 것은 1849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자료와 통찰(지식)은 1800년대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이 책은 흥미로운 통찰들로 가득합니다. 어디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역사와 고전를 사례로 '살자'는 용기의 증거이며, 피살은 불명예라는 인식이 존재했음을 살핍니다. 고대부터 영웅다운 자결이라는 관습(?) 같은 것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또 "죽음이 영원한 잠이나 행복의 세계로 가는 길이라고 배운 사람이라면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14)고 지적하는데, 생명을 경시하는 교육이 그러한 관습(?)에 한몫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한 행동을 옹호하는 가르침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스토아철학의 교리를 꼽습니다. "종교를 존중하고 신을 숭앙하던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살자'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 철학이 들어오고 사회적으로 부패가 심해지자, '살자'라는 범죄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이 퍼지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스토아철학은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고 생명의 결정권자 또한 자신뿐이므로,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학파도 같은 교리를 전파했다"(48). 또 하나 문명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나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97).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권리인가, 범죄인가를 묻는다면, 이 책은 범죄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의 범죄행위 중에서 '살자'만큼 뇌리에 큰 충격을 주고 분노를 일으킬 만한 것은 없다"(60). 그것은 '범법행위', '매우 천박하며', '치욕스러운 범죄'라 서슴없이 말합니다. 단지 형량을 정할 수 없어(범죄자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라) '죄'로서 규정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입니다(60-62). "내 몸을 내 멋대로 한다는데, 그게 잘못인가" 흔히 주장되는 이런 논리는 "어불성설인데다 무례하기까지 하다"(64)는 게 저자의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웃과 사회에 상처가 되기 떄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도 삶에서 이웃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67)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를 통계학적으로 살펴봅니다. 물론 1800년대 통계입니다. 예를 들면, 실연의 상처, 빈곤 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실연의 상처, 빈곤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보다 병들거나 무력해진 육신, 정신적 혼란, 절제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 가책 등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통찰을 종합해보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모방과 전염성인데, 오히려 그런 점에 예방과 치유가 가능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모두 1700-1800년대 자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목적이 아니라면, 1800년대의 자료들이 여전히 유의미할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한계도 보입니다. 예를 들면, 저자는 약화된 장 기능도 '살자' 충동에 한몫한다고 봅니다. 소화 장애나 담즙 분비 장애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데(172), 적절할 때 장을 비우는 것이 '살자' 충동을 억제한다는 설도 있다(180)고 전합니다. 또 이런 흥미로운 주장도 있습니다. "환자가 '살자' 충동을 느낀다면 전문의는 대뇌에 울혈이 있는지, 두뇌에 공급되는 혈액량이 적지는 않은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사혈도 자살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76). 현대의학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답할지 궁금합니다. 이외에도 이 책의 통찰이 논문이나 논술과 같이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글이 아니라, 에세이처럼 읽힌다는 것도 다소 아쉽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희망이 없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목숨이 붙어 있어야 희망도 있는 법이라고 역설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은 한줄기 희망마저 송두리째 낚아채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88)이라는 걸 기억해야겠습니다. 이 책에 인용된 존 밀턴의 말처럼, 최대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라는 말처럼, 생명을 경시여기는 것, 그것도 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 그것이 가장 최악의 범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자살을 '살자'로 바꿔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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