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시계 - 개정판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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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부모님은 서로 잘 어울리십니까? 아니, 당신이 결혼한 분이라면 배우자와 잘 어울리는 환상의 커플인가요? 간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부부로 연을 맺고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예전보다 훨씬 쉽게 남남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또 어떤 부부들은 서로를 '견디며' 일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들은 왜 서로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일까요? 혹시 그 '다름'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요? 나중엔 그 '다름'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결혼한 지 28년이 된 매기와 아이러도 서로 상극으로 보입니다. 감정적이고 정이 헤프고 남의 일이 간섭하기 좋아하는 매기는 늘 실수투성이고,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사고(문제)를 몰고 다닙니다. 매기에 비하면 남편 아이러는 침착하고 분석적이며 매기처럼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종이시계>는 매기와 아이러가 함께 친구(매기의 친구 세레나) 남편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총3부로 이루어진 <종이시계>는 매기, 아이러, 다시 매기로 관점이 옮겨지면서 그들의 의식을 따라 하루 동안의 일과 지나온 삶이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아이러는 매기가 "어째서 늘 자기들 삶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남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219). 아이러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매기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꿈을 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요양원의 보조원이 되는 길을 택한 매기는 다른 사람을 돕는 천성을 타고 난 듯합니다. 그녀가 아이러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사실은 그런 숨은 본성의 작용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러는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일을 놓아버린 아버지, 정신 지체를 가진 누나, 공포로 세상과 단절되어 버린 또다른 누나를 부양하느라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는 가수가 되겠다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들도, 점수에 안달하는 딸도, 신중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남의 일에 끼어드는 아내도 모두 인생을 함부로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인생을 낭비해버린사람은 자신의 꿈을 접고 "액자틀을 짜기 위해 소수점이나 세고 있"는 자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러에게 가족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어버린 족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질식할 것 같았다. 안개는 마치 실내 수영장이 있는 집들처럼 그들 주위에 환기가 잘 안 되고 증기로 가득 찬 작은 방을 만들었다. 모든 소리는 둔탁하게 들렸는데, 단지 그의 가족들 목소리만, 귀에 익은 숨막힐 듯한 목소리들만 또렷이 들려왔다. 안개는 그들 모두를 감싸고 가두어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누이들의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듯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때 아이러는 생각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모든 생을 이 사람들에게 붙잡힌 채로 지내왔고, 앞으로도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 아이러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은 그날 이래로 자신은 이미 삶의 실패자였음을 깨달았다"(245).

 

자신을 잡아당기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이러,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가족을 잡아당기는 매기. 그들의 결혼생활은 서툴게 만들어진 '종이시계'처럼 불안하고 어설펐지만, 그렇게 서로 부대끼는 사이 어느 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짐짝 같은 가족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해버렸다고 생각하는 아이러가 사실은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그는 진짜 낭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신이여, 그렇습니다. 진짜 낭비는 이 사람들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 나약하고 좌절해버린 아버지마저, 자신의 가엾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마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잊어버렸다"(259-260).

 

 

우리를 삶의 실패자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빛바랜 꿈? 내 발목을 잡는 가족? 나를 방해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배우자? 놀랄 만한 업적이 없는 평범한 일상?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를 삶의 실패자로 만드는 것은 위로해줄 친구가 한 사람도 없을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현재의 삶에 실망하게 될 때, 그래도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 서로의 슬픔을 위로해줄 친구가 아닐까요? 부모님의 손에서 자라다가 또래 친구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고, 한때는 친구들의 결혼식을 좇아다니기에 바빴고, 한때는 친구 아이들 백일잔치, 돌잔치에 불려다녔고, 더 나이를 먹으니 이제는 가끔 친구 부모님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난히 특별할 것도 없고, 성공이랄 것도 없는 인생, 우리는 그렇게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며, 반복하며 조용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사셨고,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고,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실수투성이이고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그래서 더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필요한 우리들이기에, 감싸주면서 용서하면서 안아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함께 긴 여행을 하는 매기와 아이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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