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다 - 해산우고
이은춘 지음 / 자연과인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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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록'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처음 배웠다. 몇몇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뜻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검색결과가 없었다. 그리 오래전 풍습도 아닌데 문화와 함께 말까지 사라졌가 보다. 만장은 "고인의 행적을 기리고 슬픔을 나누는 글귀를 써서 상여 뒤에 따라 붙는 깃발"이고, 이런 만장을 작은 글씨로 베껴 써서 책자로 역은 만장록은 "고인의 인생 행적을 제 삼자가 평가하는" 귀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다>는 퇴계학파인 한강 정구의 후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해산 이은춘 공의 만장록을 공개한 것이다. 1966년 한 시골 선비가 생을 마감했을 때, 주변의 유림들이 몰려 들어 떠나는 자를 위한 만시를 지었고, 그렇게 지어진 이별의 시를 비단이나 종이에 붓글로 써서 만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상여가 나갈 때 뒤에 따라 붙은 만장 행렬만 오백 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해산 이은춘 공의 만장록을 공개하는 증손 이봉수 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우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문화를 생각해 봐야 한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죽는 날에도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이별의 시 한 수 적어 보내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50년 전 이 땅에는 이런 문화가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다>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기념하는 지인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예전 TV의 한 예능 프로에서 연예인의 '가상 장례식'이라는 컨셉의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의 친구들은, 나의 지인들은 나의 장례식에서 어떻게 나를 추억할까, 내게 어떤 이별의 말을 건넬까 무척 궁금해지곤 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살다가신 해산 이은총 공을 기리며 문하생들과 친지들이 남긴 이별의 시는 '시골 선비'의 소박하고 성실했던 삶을 보여준다.


부모님을 지극히 모시고 농사에도 힘을 쓰며
가는 곳마다 사람 대함에 스스로 겸손하네.
마음은 항상 대쪽 같아 바람과 서리 견뎌내고
두터운 덕은 꽃잎 속 비와 이슬로 무르익었다.

깊은 정 맺은 처세 멀고 가까움 없게 하고
본업을 간직한 채 춘하추동 있게 하네.
일가 모이는 정자 지어 조상도 받들면서
오가가는 손님 친구 매번 만나도 기뻐하도다(62).


한시로 기록되고 그것을 번역한 것이여서 서사를 읽는 것보다 이해가 더디지만, 한시를 읽는 맛과 멋이 있다. 대한민국 마지막 선비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지만, 이별하는 사람들의 노래는 그것을 숭고하게 기억한다. 성실하게 땀흘리고,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을 추구했던 선비정신과 삶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벗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경건한 이별의 시로 표현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가 참으로 멋스럽고 아름답다. 고인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숭고하게 보내줄 수 있는 다른 방식이 또 있을까. 사는 일에도, 죽는 일에도, 죽은 이를 보내는 일에도 예를 다하는 진실함이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증조부의 만장록을 공개하는 증손자는 "만장록을 읽어 본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평범하고 소박했지만 먼지 하나 끼일 자리 없이 투명했고 한 점 부끄러움 없었던 한 선비의 삶을 돌아보며, 함부로 살지 말자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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