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기술 -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최민자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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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통섭, 파편화된 삶을 넘어 전일적인 삶으로 가는 길!



학문과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지식의 융합을 꾀하는 움직임이 학계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분석적 사고가 아니라, 복합적이며 다차원적인 통합적 사고를 지향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도 이와 같은 흐름에 한몫했다고 본다. 복잡해지고 다원화되는 세상을 하나로 통합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 최민자 교수님은 "자원과 에너지의 과잉소비, 지구 경제의 남북 간 분배 불균형, 빈곤과 실업의 악순환, 민족간, 종교간, 지역간, 국가간 대립과 분쟁의 격화, 군사비 지출 증대, 지구 온난화와 오존층 파괴,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와 대기, 해양의 오염, 유해폐기물 교역과 공해산업의 해외 수출 등 우리를 괴롭히는 이슈들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294-295고 진단한다.

<통섭의 기술>은 이처럼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의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제시한다. 자연과학와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은 물론 물성과 영성 등의 이원적 세계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과학과 종교, 예술과 과학, 마음이 과학 등 살피는 층위가 그야말로 우주적이다. 웬만한 교양적 지식으로는 소화하기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이론을 구축하는 개념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었는지 자신이 없다.

최민자 교수님은 ’통섭’을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철학을 넘어선 하나의 종교적 영성으로, 그리고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다. "통섭의 기술은 단순히 다양한 지식세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아(我 self)’와 ’비아(非我 other)’의 두 대립되는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소통의 미(美)의 발현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다"(37). 정리하면, 통섭의 기술이란 한마디로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설명을 읽을수록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초월’이라는 개념이 머리에 그려진다. 그러나 학문의 방법으로서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라는 개념이 내겐 너무 어렵기만 하다.

<통섭의 기술>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의식계와 물질계의 상관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며, 학문과 삶의 조화를 꾀한다. <통섭의 기술>은 삶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을 넘어서기 위해 ’통섭’ 개념이 등장하였다고 말한다. "비존재와 존재, 영성과 물성이 하나임을 알기 위해서는 앎을 존재로서 체험해야만 한다. 정신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분법은 앎의 원을, 삶의 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방편일 뿐, 진정한 앎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선과 악의 진실게임에 빠져들면 ’삼사라(samsara 生死輪廻)’가 일어나는 것이다"(61). (난무하는 동양적, 불교적 용어가 머리에 쥐가 나게 한다). <통섭의 기술>에서 최민자 교수님은 사물의 근본 이치와 관련된 초논리, 초이성, 직관의 영역을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과학 중심의 학문적 제국주의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종합적 사고가 융합할 때, 비로서 완전한 통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설명 차원이 아니라 이해 차원이 문제이며, 추론 차원이 아니라 직관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통섭이라는 툴을 사용하는 주체가 바로 일심이다. 일심[참본성, 영성]이 통섭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주 생명력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 지성이며 근본 질료인 까닭에 본체와 작용, 전일성과 다양성,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심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앎(knowing)이며, 앎은 지성에서 일어난다. 앎은 곧 ’봄(seeing)’이며, 봄 또한 지성에서 일어난다"(389).

최민자 교수님의 <통섭의 기술>은 무엇보다 자연과학 중심의 서구 통섭론의 문제점을 동양적 사고와 철학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통섭의 의미를 새롭게 풀어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어 보인다. 여기 제시된 ’통섭’을 이해하는 것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통섭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서구의 학자들과 대화하기에는 동양적인 개념과 추상적인 언어로 제시되는 테제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진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논하여지는 <통섭의 기술>을 소화하는 것 자체가 통섭의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최민자 교수님께 직접 강의를 들으면 이해하기 좀 더 쉽기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겐 너무 어려운 책, 앎과 삶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모색하는 <통섭의 기술>을 살짝 엿본 것으로 일단은 만족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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