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를 읽다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지음, 우리글발전소 옮김 / 오늘의책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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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에게 위험은 감성의 세게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위험은 메마른 공간에서 질식하는 거야. 너는 예술가이고 나는 사상가이지. 너는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깨어있다. 내게는 해가 비추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추고 있지. 네 꿈속에는 소녀가 보이지만 내 꿈속에는 소년이 보인다네"(57).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착한 것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야." "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삶의 방식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어느 순간 그동안 알아왔고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리는 진동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쌓아올렸던 삶의 조각들이 모두 무너져내리는 충격이었습니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옳은 것이 아니었고,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렇게 제 삶은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를 읽다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 책에도 알을 깨고 나오듯 잠에서 깨어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하는 청춘이 등장합니다. 그 혼란과 방황은 지루하다 할 만큼 계속되고, 오래되지만, 그가 알을 깨고 나온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데미안>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작가연보를 보면, <데미안>이 발표된 것이 1919년이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출간된 것은 1930년인데, 저에게는 이 두 책이 쌍둥이처럼 읽힙니다. <데미안>에서, 부모님의 보호 속에 경험하지 못했던 바깥 세계와 맞닥뜨린 뒤, 눈이 먼 것처럼 헤매 다니며 피폐해져갔던 '싱클레어'는 '골드문트'와 닮아 보이고, 싱클레어에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결합된 신성, 곧 아브락사스의 이름을 알려주었던 '데미안'은 잠자고 있는 나르치스를 깨워주었던 '나르치스'와 겹쳐보입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 자신을, 아브락사스의 존재를 알려준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에게 정신분석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던 '융'을 상징한다면, 이 책에서는 골드문트가 헤르만 헤세를, 인간과 그 인간의 운명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르치스는 융을 상징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아버지의 권고로 수도원에 들어오고 될 수만 있다면 수도원에 계속 남아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마음을 갖고 있었던 골드문트와, 그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을까 말까한 매우 젊은 수도원의 교사 나르치스는 모든 점에서 서로 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르치스가 사상가요 분석가라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요 동신의 소유자였으며, 니르치스가 지성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골드문트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혼란과 비애가 뒤섞인 묘한 우정을 형성해갑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던 나르치스는 잠자고 있는 골드문트를 깨우고 그를 껍질에서 해방시켜 본래의 성격을 되찾아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여겼고, 그런 나르치스에 의해 골드문트는 지금까지 자기 인생의 꿈도, 자신이 믿고 있던 일체도, 또 자신의 천명이요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체도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예술에 봉사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았던 나르치스의 직관(?)대로 골드문트는 끝내 조각가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골드문트에게 이 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이자 치유였습니다. "나는 네가 완전한 골드문트가 되기를 원할 뿐이야"(55).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사랑의 빛 속에 영혼과 영혼의 새로운 결합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금욕적인 동시에 남자다운 이상을 추구해오던 골드문트를 흔들어, 방탕한 생활이 성자로 가는 생활에 가장 가까운 길의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나르치스와의 관계는, 싱클레어와 데미안, 헤르만 헤세와 융의 또다른 모형이라는 점에서 헤르만 헤세의 또다른 자전적 소설이요, 정신분석학적 요소(공허한 우상에 지나지 않은 아버지, 억압된 기억 속에 갇힌 어머니, 유년시대와 어머니의 꿈 등)가 짙은 작품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언젠가 <데미안>이 아름다운 청춘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이교도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헤르만 헤세의 매우 사적인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던 후유증이 이 소설을 읽어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데미안>보다 더 강렬하게 와닿았던 것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형상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악마적이고, 악마적이면서도 신성하고자 하는 우리 안의 두 모습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헤르만 헤세를 읽다>라는 것이 새삼 흥미롭습니다. 헤르만 헤세라는 대문호의 내면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사적인, 감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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