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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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좋은 방]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에 담긴 20세기 초 영국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유쾌하게 풀어둔 작품이다. 내용과 문체도 좋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군상 하나하나가 살아서 펄떡거리는 것만 같아서 이 리뷰는 인물중심으로 작성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책 소개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스포일러도 다량 함유되어 있다.

1. 감초 조연중의 하나인 비브 목사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지만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인간의 모순됨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인내와 교양 아래 말없이 감추어져 있던 그의 금욕주의가 표면으로 솟아올라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났다. <결혼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제하는 건 더 좋은 일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사람들의 파혼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은근한 기쁨을 느꼈다. 루시의 경우는 본래 그가 세실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욱 기쁨이 컸다. 그는 한층 더 밀고 나갈 생각도 있었다..... 그녀가 동정의 결심을 굳힐 때까지 그녀를 위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감정은 극히 미묘한데다 어떤 사상적 배경도 없다.

 
   

나는 비브목사가 금욕적이고 예의범절에 집착하는 남자인 세실의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분류해두었기 때문에,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파혼을 반기되, 그 반기는 이유가 금욕주의적인 이유라니, 목사이지만 금욕적이라기보다는 자유롭고 생동감있는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인지 이 부분은 그 어떤 구절보다도 내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의 모순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브목사는 그저 그런 조연, 자유분방한 목사 캐릭터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었고, 그것은 그의 뜬금 없는 금욕주의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2. 주인공인 루시의 사촌언니 샬럿은 보잘것 없는 노처녀이고, 어느 한 부분에서도 매력을 찾을 수 없었던 참으로 지루하고, 서울 한복판에서 돌던지면 맞고 누구냐고 소리칠 것만 같은 김이박씨, 그만큼 평범한 캐릭터이지만(인줄로만 알았지만) 플롯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며 작가가 인간의 모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사유했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캐릭터이다.  

   
  그렇게 한참을 흘러가다 다시 샬럿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니 샬럿의 행동은 아까보다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불분명한 것을 싫어하는 조지가 말했다. "샬럿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왜 당신과 아버지가 만날 수도 있는 위험을 방치했을까? 어쨌거나 그 분은 아버지가 거기 계신 걸 알고도 그냥 교회에 갔어요."  
   

마지막에 조지와 루시의 대화에서 샬럿은 그들의 로맨스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떠맡아왔다는 걸 우린 알아챈다. 어찌나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인지, 나는 비브 목사의 생생함에 이어 또 한번 놀란다. 지금까지 샬럿이 보여주었던 자기희생적인 선의, 그래서 가식적으로 보였던 그녀의 선의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알게되는 주인공의 충격에 나는 최근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하여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샬럿을 미워하던 주인공 루시가 더이상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차디찬 복수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식덩어리(인줄로만 알았던) 샬럿이 가식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더.  

3. 조지의 아버지 에머슨씨는, 속세에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겨우 감당해가는 우리로써는 결코 맞대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는 조르바이며,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며, 늙은 '래리'이다.  

   
  나는 녀석에게 항시 사랑을 믿으라고 가르쳤어요. <네가 사랑을 느끼면 그건 진실이란다.>라고 말요. <열정은 장님이 아니야. 열정이야말로 눈이 밝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여자는 네가 진실로 이해하게 될 유일한 사람이란다.>라고도 말했어요.  
   
   
 

"이 늙은이 말을 들어요. 이 세상에 혼란보다 나쁜 건 없어요. 죽음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무시무시해보이는 그런 것에 맞서기는 오히려 쉬워요. 지난날을 돌아볼 때 두려운건 내가 만났던.. 어쩌면 잘 피했을지도 모르는 혼란들이에요. <중략> 지금 아가씨가 그런 혼란에 빠진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구려."  
그녀는 침묵했다.
"내 말을 믿어요, 허니처치양. 인생은 눈부시지만 또 힘든 거요."
그녀는 계속 침묵했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쓴 적이 있어요. <인생은 바이올린 연주회와 같다. 그런데 그 연주법은 연주를 해나가는 무대에서 익혀야 한다>고 말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살아가는 현장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익혀야 해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능력을." 

 
   

네. 맞아요. 전 지금 혼란에 빠져있어요! 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난 이 노인네에게 기대고 싶었다. 이 사람은 루시의 눈에 비늘을 떼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 눈의 비늘도 떼주었다. 그래서 난 루시가 얼마나 힘든 결단을 내렸는지 안다. 아마 나는 하지 못할. 

3. 루시. 아, 루시.. 완전 매력적인 남자캐릭터 조지는 단지 루시를 돋보이게 해 주었던 역할이었던가 싶을 만큼 루시는 매력적이다. 선홍빛 드레스를 입으면 홍학 같은 그녀. 이 부분에서 어찌나 웃었던지.. ㅎㅎ 

사로잡혀 있었던 것에서 단호히 벗어날 수 있었던 이 여자는 진정한 용자다. 가족과 20여년을 벼려왔던 신념을 버리고, 머리나 관습이 추구하는 것보다 단지 마음이 추구하는 바를 '20세기 초'에 이루다니. 이것은 백년이 지난 지금도 내겐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방종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현실감각과 경제관념을 갖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의 결단을 내린다. 이것은 그녀가 약간의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약혼자 세실보다 월등하게 미래지향적인 선택이었다. 

4. 약혼자 세실은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만 가까이하기엔 차가운 대리석 조각상 같은 캐릭터를 잘 보여주었고, 동생 프레디는 누나의 무릎을 베고 누운 모습 하나로 '남동생 로망'을 실현해준다. 게다가 마지막의 편지라니!

이 작품은 행복한 로맨스이다. 그러나 반대로 독자의 한계를 일깨워주기 때문에 비극적이기도 하다. 나는 인간들로 가득한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현실에 대해서 반성을 많이 했고, 잠재적인 욕망과 나의 모순에 놀랐다. 또한 현실적인줄만 알았던 나의 이상이 나의 체념에 굴복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무척 아파했다. 나는 루시처럼 깰 수 없을 것이다. 그녀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포기해왔고, 포기함으로써 얻은 것이 많다고 믿고 있다.  

포스터는 내가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교묘하게 알려줌으로써 날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참..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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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3-3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소리 좀 할게요. 제가 좋아하는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에드워드 포스터를 비판하더군요. <인도로 가는 길>을 격하게 비판하던데 열린책들 전집판으로 <인도로 가는 길>을 읽어 보았습니다.
포스터가 이해한 인도인은 종교로 살고 죽는 사람이더군요. 당시 영국과 인도의 관계로 확장시키면 이 소설의 메시지가 '너희는 열심히 종교나 믿어라. 나머지는 우리가 담당하겠다'가 아닐까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전망 좋은 방>은 읽지도 않고 혓소리 좀 했습니다.


Forgettable. 2010-03-31 18:23   좋아요 0 | URL
다음 책으로 뭘 읽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는 아니고 이 리뷰를 쓰던 당시에 정해놨는데 까먹었네요-_-)

여튼 [인도로 가는 길]은 마지막에 읽으려고 했어요. 인도에 좋은 기억이 있어서 좋은 작가가 다닌 인도의 느낌은 어떨까 기대가 컸거든요. 맛있는 건 아껴먹는 버릇이;; 그런데 그 당시가 식민지 시대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꼭 그 점을 염두하고 책을 읽어볼게요.

얼마 전에 황석영 작가를 보면서 작가의 사상이나 인간성(?)은 사실 작품을 읽는데 아무 관련이 없다, 작품만 좋으면 되었지 뭘, 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것은 너무 무책임한 독서겠죠.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며 책을 읽어야겠어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1 09:1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포스터는 동시대 영국 작가들에 비하면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키플링의 <킴>을 보니 이건 그저 제국주의 소설이더군요. 이런 소설을 세계문학전집으로 펴낸 출판사의 안목도 문제가 있구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건지......
어릴 적 <정글북>을 재미나게 봤는데, 이 소설의 작가가 이 수준이란 게 실망스러웠습니다. <정글북>도 달리 생각이 되구요.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헨리 나웬이 동성애자란 걸 최근에 알았어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요. 근데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숨겼는데, 생전에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이 소설에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나중에 <모리스> 읽어보고 이야기 나누었으면 합니다.

Forgettable. 2010-04-01 19:38   좋아요 0 | URL
앗, 키플링의 [킴]이 번역되어 나와있었군요!!
게다가 제국주의 소설이라니..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에서 한 챕터를 차지하고 있는 책인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궁금하네요. 지금은 이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나고 확인이 안되는데..ㅜㅜ 다른 책이랑 막 헷갈려서 기억해요. 혹시 인도에 관련된 책, 수도승에 관련된 책이었던가요?

아, 읽어야 할 게 갑자기 확 늘어난 기분인데 [모리스]까지! ^^
앞으로 이야기 나눌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ㅎㅎ

지금 잔뜩 추리소설을 질러놓았는데-_-; 책쇼핑을 다시해야 하나..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2 10:0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줄거리가 맞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망 좋은 방]을 새 달에는 꼭 읽어보려구요. 읽고 나서 써두신 단평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봐야겠네요.
왠지 5월과 이 책이 어울릴 것 같아서요^^

Forgettable. 2010-04-20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욕심과는 다르게 느림보처럼 엉뚱한 책을만 읽고 있어요.
백수가 되면 좀 더 깊은 독서를 할 줄 알았는데, 점점 시간만 먹어치우는 독서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이게 참 자괴감만 들고.. 초조해지고, 그렇네요.

꼼꼼하게 읽어보신다고 해서 저도 꼼꼼히 다시 읽어봤더니 무척 부끄러운데요!!!
읽으시기 전에 뭔가 좀 다듬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근데 퇴고랑은 왠지 거리가 멀어서 ㅠㅠ)

따뜻한 날 읽으시면 기분좋아질 책이에요. 아, 갑자기 포스터의 글이 마구 당깁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