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하철에서 [로마인 이야기] 14권을 읽는 중년의 남자와 마주쳤다. 손가락이 아주 길었고, 두꺼운 안경알 때문인지 약간 어리버리해보였는데, 안경 너머의 눈이 날카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2010년 2월에 로마인 이야기.. 14권을 읽는 사람이라. 

로마인 이야기는 더이상 베스트 셀러나 유행도 아니고, 1~2권을 읽다 포기한 것도 아니고 14권을 읽고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단지 흥미와 호기심, 인내심으로 뭉친 독서가일 것 같다. 새롭다. 난 나의 이런 생각과 감상에 의해 약간 미화된 중년의 책읽는 남자를 자꾸 흘낏흘낏 훔쳐보았다. 

책을 쭈삣쭈삣 꺼내던 아저씨는 어느덧 젊고 차가워져 있었다.
독서하는 남자는 평소엔 멍해보여도 책을 읽을 땐 맑고 또렷해 보인다.. 

그를 바라보며 나의 책읽는 모습은 어떤지, 내 남자의 책읽는 모습은 어떤지 상상해보았다.
내 모습은 상상하기 쉬웠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약간 미간을 찡그리고 집중하는 버릇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 남자의 책읽는 모습은 어떤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책읽는 사람과 연애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 책읽는 남자와의 연애는 어떨까? 

첫 만남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첫째딸이 그랬던 것처럼, 샤워를 하며 장미향을 내뿜으면 그에 반해서 한달음에 백리길을 달려와줄까, 첫 키스는 [전망 좋은 방]에서처럼 봄냄새에 취해 이태리의 어느 언덕의 덩굴속에서 넘어졌을 때 우연히 지나가다가 갑작스레 키스를 해줄까, 우리의 섹스는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우르슬라의 아주 먼 후대의 자식이 돼지꼬리를 한 아기를 만들 때처럼 온몸에 꿀을 바르고 섹스를 하다가 잠이 들어서는 불개미한테 갉아먹히기 직전에 눈을 뜨고 깔깔대며 개미 소탕을 할까, 권태기가 오면 핀터의 어느 희곡에서처럼 서로 내연녀, 내연남 연기를 하면서 서로에게 바람을 필까.  

 

 

 

 

하나 더. 잠이 안오는 밤에는 [거미여인의 키스]에서의 그녀처럼 서로 이런저런 흥미진진하고 낭만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잠들고 싶다. TV를 보다 잠드는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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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2-16 09:0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렇겠죠. ㅋㅋ 꿈꿔봤을 뿐 바라지도 않습니당ㅎㅎ

2010-02-16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세 2018-04-27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허세지리네여

Forgettable. 2018-04-27 21:2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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